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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총각(洪總角)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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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홍봉의(洪鳳儀)
생년?(미상)
졸년1812(순조 12)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변란 > 모반인
출신지곽산

[상세내용]

홍총각(洪總角)
미상∼1812년(순조 12). 조선 후기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농민지도자. 홍봉의(洪鳳儀)라고도 불렸다. 곽산 출신.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도원수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곽산에서 말 위에 어염(魚鹽) 등을 싣고 다니면서 판매를 하던 소상인이었다. 상민출신의 몰락농민이었던 그는 각지를 떠돌다가 상업이 성하던 이곳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의식만 겨우 꾸려나갈 정도로 빈곤하였다.

조선 후기 농민층 분화로 한편에서는 부를 축적하여 적극적으로 신분상승을 해나가던 자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그와 같이 경작할 땅도 없어서 나이가 지나도록 장가조차 들 수 없었던 빈민들이 광범하게 존재하였다.

그는 현실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부패한 세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역사(力士)를 모집하려고 각지의 인물들을 물색하던 홍경래에게 발탁되어 그의 사회변혁 구상에 대하여 깊이 공감, 그의 부하가 되었다. 힘이 장사인 데다가 이제초(李濟初)와 함께 말타기‧활쏘기에 특출하였다. 태천김사용(金士用)이 지략과 무용을 겸비하였던 데 반하여, 그는 우직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용맹과 보통사람이 가질 수 없는 용력으로, 특히 홍경래의 사랑을 받았다.

난을 일으킬 때에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의 모습에 대하여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에서는, “얼굴이 넓고 검으며, 수염이 없고 체구는 크고 키는 5척을 넘으며 나이는 27, 28세로 보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호피관(虎皮冠)을 쓰고 갑옷을 입은 그는 여러 관아를 습격하였는데, 가산(嘉山) 관아를 점령하여 군수 정시(鄭蓍)와 그의 늙은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각 고을을 점령할 때도 먼저 선봉부대 200∼300명을 거느리고 목표지역에 가서 관아를 점령한 뒤 홍경래의 주력군이 뒤따라 입성하였다.

박천 송림전투에서 관군과 일대접전을 벌였는데, 전군을 인솔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나 전술상의 오류로 패주하게 되었다. 봉기군은 관군과의 비등한 전투 병력으로 평야에서 전투를 전개함으로써 활과 조총으로 무장한 숙련된 관군을 대적할 수 없었던 점, 관군의 지휘부는 병사 이해우(李海愚)가 누각 높은 곳에 올라가 양군의 전투를 조감할 수 있었는 데 비하여, 봉기군의 지휘부는 평야에 있었으므로 국지적인 면 밖에 볼 수 없었던 점, 진세구축에서 우세한 관군을 무모하게 중앙돌파하려 하였던 것 등이 패주의 원인이었다.

그는 잔류병을 이끌고 정주성으로 퇴각, 4개월 동안 버텼으나 그의 무용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세한 관군의 화력 앞에 무너져 사로잡힌 뒤 곧 효수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關西平亂錄
陣中日記

[집필자]

정석종(鄭奭鍾)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