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민(李好閔){2}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638BBFCB1762X0 |
자(字) | 학여(學餘) |
호(號) | 귀헌(龜軒) |
시호(諡號) | 효헌(孝獻) |
생년 | 1762(영조 38) |
졸년 | 1823(순조 2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의(全義)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5대조 | 이만웅(李萬雄) |
[상세내용]
이호민(李好閔)
1762년(영조 38)∼1823년(순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학여(學餘), 호는 구헌(龜軒).
이만웅(李萬雄)의 5대손이다.
1804년(순조 4)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자(陞資)되고, 이듬해 대사간‧참의를 거쳐 3년 후 황해도감사가 되었다.
1809년 이조참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815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한성부판윤, 다시 의정부좌참찬‧이조참판‧대사헌이 되어 진주정사(陳奏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이조판서‧판의금부사가 되었는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 서얼의 통허(通許)를 역설하였다. 뒤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이만웅(李萬雄)의 5대손이다.
1804년(순조 4)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자(陞資)되고, 이듬해 대사간‧참의를 거쳐 3년 후 황해도감사가 되었다.
1809년 이조참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815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한성부판윤, 다시 의정부좌참찬‧이조참판‧대사헌이 되어 진주정사(陳奏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이조판서‧판의금부사가 되었는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 서얼의 통허(通許)를 역설하였다. 뒤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號譜
號譜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명 : "호민(好敏)"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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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09-12-31 | 송근수(宋近洙) 찬(撰) 이호민(李好敏) 묘표를 참고하여, 이호민(李好閔)을 이호민(李好敏)으로, 생년 미상을 1762(영조 38)년으로, 시호를 효헌(孝獻)으로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