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현(甘麒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10AE30D604B1880X0 |
이명(異名) | 감태현(甘泰鉉) |
자(字) | 영팔(英八) |
호(號) | 동미(東湄) |
생년 | 1880(고종 17) |
졸년 | 1964 |
시대 | 항일기 |
본관 | 회산(檜山) |
활동분야 | 관료 |
부 | 감재원(甘在元) |
조부 | 농와(農窩) |
조부 | 감회정(甘檜廷) |
증조부 | 감수운(甘守雲) |
외조부 | 안중금(安中嶔) |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내동리(內洞里) |
[상세내용]
감기현(甘麒鉉)
1880년(고종 17)∼1964년.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영팔(英八), 호는 동미(東湄). 어렸을 때 이름은 태현(泰鉉)이다.
증조부는 감수운(甘守雲)이고, 조부는 농와(農窩) 감회정(甘檜廷)이다.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의관(僉知中樞府事兼議官)을 지낸 우우재(友于齋) 감재원(甘在元)이고, 모친은 순흥(順興) 안중금(安中嶔)의 딸이다. 1880년(고종 17)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내동리(內洞里)에서 태어났다.
1899년(광무 3) 20세에 참정(參政)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로 추천되었다.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승진되었으며, 1904년 혜민원참서(惠民院參書)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민영환이 죽자 그를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초계현감(草溪縣監)이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이에 분개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42년 호서의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여, 구조하(具祖夏), 김기성(金璂成) 등 명사와 교류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김해 청천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64년에 죽었다.
증조부는 감수운(甘守雲)이고, 조부는 농와(農窩) 감회정(甘檜廷)이다.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의관(僉知中樞府事兼議官)을 지낸 우우재(友于齋) 감재원(甘在元)이고, 모친은 순흥(順興) 안중금(安中嶔)의 딸이다. 1880년(고종 17)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내동리(內洞里)에서 태어났다.
1899년(광무 3) 20세에 참정(參政)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로 추천되었다.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승진되었으며, 1904년 혜민원참서(惠民院參書)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민영환이 죽자 그를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초계현감(草溪縣監)이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이에 분개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42년 호서의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여, 구조하(具祖夏), 김기성(金璂成) 등 명사와 교류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김해 청천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64년에 죽었다.
[참고문헌]
東湄先生文集
[집필자]
김성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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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