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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찬(閔泳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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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보(國寶)
생년1873(고종 10)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겸호(閔謙鎬)
조부민치구(閔致久)

[상세내용]

민영찬(閔泳瓚)
1873년(고종 10)∼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국보(國寶). 민치구(閔致久)의 손자로, 이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며, 민영환(閔泳煥)의 동생이다.

1889년(고종 2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90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올랐다. 홍문관박사한림을 거쳐 그해 11월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으며, 이어 시강원겸문학(侍講院兼文學)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그해 7월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나섰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귀국하였다.

1896년 학부협판으로 칙임관3등에 올랐으며, 이듬해 중추원1등의관이 되었고, 1898년 법부협판을 지냈다. 그해 6월 법국파리만국박물회부원(法國巴異萬國博物會副員)이 되어 활약하였다.

또, 7월 궁내부협판을 지냈으며, 10월 농상협판에 임명되었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2등에 서훈되었으며, 태극장(太極章)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902년 주차법국특명전권공사(駐箚法國特命全權公使)가 되었으며, 1903년 적십자회 회원이 되어 스위스에서 개최된 적십자회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04년 육군부령에서 육군참장(陸軍參將)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9월 외교사절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1등에 서훈되었다.

1909년 규장각지후관(奎章閣祗候官)이 되고 칙임관2등에 올랐으며,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에도 일제에 일정하게 협력하였다.

조선 말기의 민씨척족으로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외교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榜目
高宗時代史 3∼6(國史編纂委員會, 1970∼1972)

[집필자]

박맹수(朴孟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