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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병(尹始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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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51(철종 2)
졸년1932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변란 > 모반인

[상세내용]

윤시병(尹始炳)
1851년(철종 2)∼1932년. 친일파.

일찍이 무과(武科)에 등과(登科)하여 무관으로 출사(出仕)하여 충청병사까지 지냈다. 그는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898년 11월 29일에는 유맹(劉猛), 최정덕(崔廷德),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 출신으로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며 개화파들에 의한 내각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에 의한 독립협회 해산과 간부체포 때, 정부의 추적을 피해 미국인 집으로 피신하여 체포.투옥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해 들어오자, 송병준(宋秉畯)과 의기투합하여 1904년 8월 20일 유신회의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자신이 회장자리에 앉았다.

이후 러일전쟁 때, 연 11만4500명의 함경도 지방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일본군 군수물자의 수송을 맡았으며, 일본군을 위한 첩보활동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의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에 긴요한 철도부설 공사를 돕기 위하여 연인원 14만9114명을 동원하였다.

일진회의 이러한 공로로 그는 일제로부터 일훈욱일4등장(日勳旭日四等章)을 받았다. 일진회는 ‘을사조약’를 체결하기 위해 이토(伊藤博文)가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한발 앞서 1905년 11월 6일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09년 송병준과의 갈등으로 일진회를 떠난 그는 조선노동협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고 이 단체를 이끌면서 한일합병 공작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친일파 99인』(돌베개, 1993)
『원한국일진회역사(元韓國一進會歷史)』(이인섭, 문명사, 1911)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田中正則, 1913)
『한국신사명감(韓國紳士名鑑)』(牧山耕將, 1911)

[집필자]

박성진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11-17민족문화대백과 내용으로 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