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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明成皇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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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민비(閔妃)
생년1851(철종 2)
졸년1895(고종 32)
시대조선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왕실 > 비빈
민치록(閔致祿)
묘소미금시

[상세내용]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년(철종 2)∼1895년(고종 32). 고종의 비. 흔히 민비(閔妃)로도 불린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1. 출신과 간택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2. 대원군과의 갈등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그녀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명성황후대원군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때문이라 하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政敵: 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趙大妃 세력, 趙斗淳‧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金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載冕과 형 李最應 세력 및 崔益鉉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끔 하여 양주(楊州) 곧은 골[直谷]에 은퇴시켰다.
3. 정권 장악과 친정외교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4. 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시해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일본의 한반도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및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의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후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閔妃執權期韓廷對外關係의 國際政治的 考察(金幸子, 梨花女子大學校, 1966)

[이미지]

[집필자]

이원순(李元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