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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하(鄭秉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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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화(子華)
호(號)남고(南皐)
시호(諡號)충희(忠僖)
생년1849(철종 즉위)
졸년1896(건양 1)
시대조선후기
본관온양(溫陽)
활동분야관료 > 관리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병하(鄭秉夏)
1849년(철종 즉위)∼1896년. 조선 후기의 관리. 중인(中人).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남고(南皐).

1881년(고종 18)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권고에 따라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낼 때, 통상사무아문(通商事務衙門)의 관리로서 광산‧조폐‧제철‧피혁 등에 관련된 기계의 구입을 위하여 대판(大阪)에 파견되었다.

1886년 주사(主事)에서 사관으로, 1889년 협판(協辦)으로 승진하였다. 고종이 외국사정을 즐겨 들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에 다녀온 관리들이 궁중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이들을 별입시(別入侍)라고 하였는데, 정병하도 여기에 포함되어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즉,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견제하려던 미국공사 폴크(Foulk, G. C.)와 깊은 관계를 맺기도 하고, 김양묵(金良黙) 등과 함께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할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박정양(朴定陽)이 주미공사로 부임하여 위안스카이가 강요한 이른바 삼단(三端)을 무시한 일이 일어나자, 고종의 명령에 따라 위안스카이를 방문하여 경위를 밝히고, 청나라 공사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는 조건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외관계부문에서 활동하면서, 궁중에 출입하며 다른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고, 전환국과 광무국에 관여하면서 국고를 낭비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888년 밀양부사로 부임하기 전에는 신병으로 경기도 안산에 있던 집에서 한동안 요양하였다.

1894년경까지 밀양부사로 재임하면서, 나라가 상업으로 자강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동양과 서양의 농학을 종합하여 『농정촬요(農政撮要)』를 편찬하는 동시에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다.

1890년 전운사를 겸임하였고, 이운사(利運社)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30만냥에 가까운 거두지 못한 세금을 완납하였고, 옛 향약을 토대로 「밀주장정(密州章程)」이라는 향약을 만들었다. 특이하게도 이때 극락전(極樂殿)이라는 불교사찰을 건축하였다.

1894년 7월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의 농상아문(農商衙門)의 협판으로 기용되었으며, 영남총무(嶺南總務)로 부세와 조운을 맡았다.

다음해 내장원장(內藏院長)농상공부(農商工部)협판을 겸임하였고, 친미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을 대신하여 대신서리가 되었다. 이 당시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나, 고종민비의 신임을 받아 왕실재정을 맡았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8월 20일 궁중에 머무르면서, 일본인들의 입궐은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피하지 말도록 민비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또, 민비폐비를 극청하고, 그 조칙(詔勅)을 썼다. 유길준(兪吉濬) 등이 고종에게 단발을 시범보이도록 강요하자, 고종정병하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하였다.

아관파천 후 역적으로 지명되어 이완용(李完用)의 심복인 총순(總巡) 소흥문(蘇興文)에게 경무청 문앞 돌다리 위에서 피살되었고, 종로에 버려진 시신을 군중들이 돌로 치고 사지를 찢었다.

1907년 쇄신도화(刷新導和)라는 명분으로 죄를 벗게 해주었으며,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通商事務衙門先生案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韓國近代農業史硏究(金容燮, 一潮閣, 1975)

[집필자]

장영민(張永敏)
대표명정병하(鄭秉夏)
병하(秉夏)
성명정병하(鄭秉夏)
시호충희(忠僖)
정남고(鄭南皐)

성명 : "정병하(鄭秉夏)"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乙未日錄n1책吳在豐金鎭賢金元濟兼主 事李濟九金賢培進○內藏院長鄭秉夏依 願免本官○內閣奏本捧入時署理大臣金宗 漢主事崔
乙未日錄n1책金奭基任章陵參奉敍判任官八等○勅令命農商 工部協辦鄭秉夏로兼任內藏院長라○下午一時日本 前公使井上馨辭
外案申正擬入 除楊州 朴齊文 乙酉六都榮川來 換唐津 鄭秉夏 乙酉十一唐津換來 密陽 金宏臣 戊子五安山來 捴
外案亥六都寧海來 龍仁 趙駿九 丁亥十慶州除來 兎山 鄭秉夏 戊子五富平來 己丑十一特仍 李範善 甲午七
掌禮院日記v4○贈奎章閣提學鄭秉夏諡號○忠僖慮國忘家曰忠小心恭愼曰僖○故軍部大臣安駉壽諡號○毅愍剛而能斷曰毅在國逢艱曰愍故學部大臣徐光
掌禮院日記v4○贈諡本月十五日贈提學鄭秉夏故軍部大臣安安駉壽故學部大臣徐光範에게對야左와如히贈諡심이라
慶尙道咸安郡叢鎻錄n1-3책仲各言其所在處治績之美統制使閔公 敬鎬 密陽 府使鄭秉夏事也元仲又擧其所管洙山國農所事爛說娓娓不覺夜深忽聞
全羅道智島郡叢鎻錄n1-2책使趙羲淵命臨時署理學大法大徐光範命署理大臣事務農協鄭秉夏 ○內部告示兵丁과巡檢의相爭한事實로兵器還收하고訓
全羅道智島郡叢鎻錄n1-2책下陪從內殿移 御于慶運宮勅命警務廳收捕逆魁金宏集‧鄭秉夏使巡檢押至警務廳前大路上 搏殺之追捕各部大臣兪吉濬
全羅道智島郡叢鎻錄n1-2책外大金內大愈吉濬度大魚允中軍大趙羲淵法大張博農 大鄭秉夏宮協金宗漢警務使許璡免本官特旨免懲戒李載純任摠理金
韓史綮v3期仍召訓練隊官禹範善李斗璜等語其事範善等亦以本隊朝夕將罷怏怏于中皆願助之時后頗聞三浦動靜以問宮內府官鄭秉夏曰聞日本人將有事汝知之乎秉夏者本倭譯官而被王寵幸者也知三浦謀而詐對曰日本人保無他意願勿慮之后遂信而不
韓史綮v3十二年倣各國用太陽曆仍建元曰建陽以開國五百四年冬十一月爲元年春正月○以兪吉濬爲內部大臣張博爲法部大臣鄭秉夏爲農商工部大臣博鏡城人博涉書史尤熟於泰西新學革政後爲法部官嘗署理部務有忠淸民呈牒言前領議政沈舜澤觀察
韓史綮v3大然之二月夜請大院君入闕遂潛同大院君出至俄羅斯使館下詔罷內閣諸臣職隨遣警務官捕金弘集兪吉濬趙羲淵張博鄭秉夏五人弘集秉夏被捕斬死吉濬等三人逃之日本禹範善李斗璜以下凡涉閔后之事者皆踵而隨之弘集有文學廉淸敏幹爲外
韓末忠義錄n1-2책黨革命諸臣怨 之與三浦再謀不軌作誓約文連署卽金弘集鄭秉夏趙羲 淵張博權瀅鎭李範來禹範善李斗璜李軫鎬金允植是
農士儂n1책爲國母報讐而出謀長安民一幷勿爲驚 動大逆不道金弘集鄭秉夏先爲梟首李斗橫 禹範先卽捉囚其餘黨魚允仲趙喜連金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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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