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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학(洪在鶴)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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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문숙(聞叔)
생년1848(헌종 14)
졸년1881(고종 18)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호국 > 지사
홍창섭(洪昌燮)
해평황씨(海平黃氏)

[상세내용]

홍재학(洪在鶴)
1848년(헌종 14)∼1881년(고종 18).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문숙(聞叔).

부친은 홍창섭(洪昌燮)이며, 모친은 해평황씨(海平黃氏)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뒤 이항로(李恒老)에게 배웠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맺어지려 할 때 유생과 더불어 반대상소를 가지고 상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같은 뜻에서 반대상소를 올린 당시 참판이었던 최익현(崔益鉉)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되어 이를 통탄하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척사의식(斥邪意識)은 더욱 강렬해져 드디어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으로 승화되었다.

1880년 일본에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주일청국공사관(駐日淸國公使館) 참찬관(參贊官)이었던 황쭌셴(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고종에게 올려 이에 대한 찬반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은 개화정책을 강화,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책략』의 복사본을 전국유생에게 배포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개화태도에 대하여 수구파(守舊派) 정객과 전국유생들의 반대의 소리는 점점 높아갔다. 이른바 유생들의 신사척왜상소(辛巳斥倭上疏)의 첫 포문을 연 것은 1881년 2월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이다.

이 상소의 소두 이만손과 제소자 강진규(姜晉奎)가 귀양가자, 같은해 3월에 황재현(黃載顯)홍시중(洪時中)의 반대상소를 비롯, 5월에는 경상 유생 김진순(金鎭淳), 경기 유생 유기영(柳機永), 충청 유생 한홍렬(韓洪烈)의 상소, 윤7월에는 경기 유생 신섭(申㰔), 충청 유생 조계하(趙啓夏), 전라 유생 고정주(高定柱), 강원 유생 홍재학의 상소 등 신사척왜소가 연달아 올려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홍재학의 상소문이 가장 과격하였다. 그는 상소문에서 당시 개화정책에 앞장을 섰던 김홍집이유원(李裕元)에 대한 규탄만 아니라 국왕까지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즉, 국왕은 친정 이래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대한 태도가 애매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학의 무리를 방치한 실정을 지적하고 나아가서 척사윤음을 반포한 이후의 태도가 구태의연한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 극언하고 그 기만함을 비판하였다.

또, 개국 이래 국내에 보급된 『중서문견(中西聞見)』『태서문견(泰西聞見)』『만국공법(萬國公法)』 등이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신기한 것을 숭상하는 무리들은 견문을 넓히고 흉금을 여는 신서(新書)라고 고취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육예육과(六藝六科), 즉 공자맹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단언하여 그 사학성을 규탄하고 있다.

이 상소로 위정자들의 격분을 사서 참형을 당하였다. 이 상소는 한말의 정통적인 위정척사사상과 애국정신의 발로이며 우국적인 상소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改修日記
日省錄
梅泉野錄
騎驢隨筆
韓末의 民族思想(洪淳昶, 探求堂, 1975)
開港當時의 危機意識과 開化思想(韓㳓劤, 韓國史硏究 2, 韓國史硏究會, 1968)
開化期政治意識狀況(具範謨, 韓國政治學會報 3, 1969)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