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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魚允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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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집(聖執)
호(號)일재(一齋)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848(헌종 14)
졸년1896(건양 1)
시대조선후기
본관함종(咸從)
활동분야정치 > 정치가
어약우(魚若愚)
출신지충청북도 보은
저서『동래어사서계(東萊御史書啓)』
저서『수문록(隨聞錄)』
저서『서정기(西征記)』
저서『간독요초(簡牘要抄)』
저서『종정연표(從政年表)』
저서『어윤중전집』

[상세내용]

어윤중(魚允中)
1848년(헌종 14)∼1896년. 개화기의 정치가.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충청북도 보은 출신.
1. 가계와 관직
어약우(魚若愚)의 아들로 태어나 9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하면서 밤에 독서하였다.

20세 때인 1868년(고종 5) 지방유생 50명을 뽑아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게 하는 칠석제(七夕製)라고 하는 자격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인 186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주서로 임명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뒤이어 헌납교리지평필선을 거쳐 양산군수를 역임하였다.
2. 행정개혁안
1877년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만 9개월간 전라도일대를 고을마다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지방행정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돌아와서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국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의 개혁안은 전라도 지방 농민의 참상 원인이 조세수탈에 있음을 지적하고, ① 잡세혁파, ② 지세제도(地稅制度)개혁, ③ 궁방전‧아문둔전제도의 개혁, ④ 환곡제도 폐지, ⑤ 삼수포세(三手砲稅)의 폐지, ⑥ 재결감세(災結減稅), ⑦ 도량형의 통일, ⑧ 지방수령의 5년 이상의 임기 보장, ⑨ 조운선제도(漕運船制度)개혁, ⑩ 역로제도 개혁 등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고종은 이 개혁안을 경청하여 어윤중과 오랫동안 논의하였으나, 개혁안은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고, 그뒤 갑오경장 때는 자신의 손으로 더욱 전진된 개혁을 단행하였다.
3. 신사유람단 참가
그가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하여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81년에 일본 국정시찰단인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60명을 일본에 파견할 때 조사(朝士)의 한 사람으로 선발된 이후이다.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재정‧경제 부문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에 국내에서는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을 둘러싸고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이 비등하였으므로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시찰단원의 조사들은 동래암행어사로 발령을 받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어윤중은 1881년 1월 동래암행어사의 발령을 받고 그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유정수(柳定秀)윤치호(尹致昊)김양한(金亮漢) 등과 통역‧하인 등을 거느리고 4월 부산을 출항하여서 일본나가사키(長崎)대판(大阪)경도(京都)고베(神戶)요코하마(橫濱)를 거쳐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약 3개월간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 모든 부분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참고자료를 수집하였다.

다른 조사들은 이해 7월 귀국하였지만 어윤중은 자기의 수행원인 유길준윤치호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둔 뒤 다른 수행원만 거느린 채 청나라 톈진(天津)에 가 있는 영선사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하여 한달 더 일본에 체류하였다가 이해 9월 청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영선사 김윤식과 공학도를 만나보고 중국의 개화정책을 견문하였으며,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등과 회담한 다음 이해 12월 귀국하였다. 그는 1년간의 일본중국 시찰의 복명서를 제출하고 국왕에게 그가 견문한 사실과 조선의 개화정책을 위한 그의 의견을 개진하여, 초기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작용을 하였다.
4. 통상조약 체결
1882년 귀국한 지 두 달 뒤에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시 파견되었다. 그 이유는 청나라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고 그 초안까지 준비하여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조정에서 그에 대한 문의를 함과 동시에 청나라에 파견되어 있는 공학도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해 4월에 청나라에서 조미통상조약 문제를 심의하고 조미수호조규에 합의하였으며, 영국대표와 만나 조영수호조규문제와, 독일대표와 조독수호조규문제를 협의하였다.

그가 텐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므로 청군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어, 이홍장 등이 이미 초안해놓은 불평등조약인 조중수륙무역장정(朝中水陸貿易章程)에 조인하는 굴욕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래 청나라에 대하여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있던 그가 그뒤 청나라에 대하여 냉담하게 된 것은 이때 청나라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부당한 요구를 경험하였기 때문이었다.

1883년에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조중수륙무역장정에 의거한 북방무역에서 조선측의 이익을 증진시키며 국경을 튼튼히 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1883년 3월에 청나라측과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을 협정하고, 6월에는 회령통상장정(會寧通商章程)을 협정하였으며, 도문강(圖門江)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조사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1884년에 서북경략사와 함께 처음에는 병조참판, 뒤에는 호조참판을 겸임하였다.
5. 갑오경장 후 경제개혁 단행
이 무렵의 활동은 매우 정열적이었으며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는 1883년에 20개조로 된 과감한 정부기구개혁안을 제출하여 그 실행을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이 개혁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가 잠시 보은에 귀향하여 있는 동안에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는 이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그뒤 민비정부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1893년에 동학도들이 보은집회를 열고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천명하여 호서호남 지방이 동요하게 되자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임명, 파견되었다.

당시 관료들이 모두 동학도들을 비도(匪徒)라고 탄압만 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윤중은 처음으로 동학도들을 대담하게 ‘민당(民黨)’이라고 하여 그들의 요구에 동정을 표시함으로써, 동학농민들로부터는 지지를 얻고 관료들로부터는 빈축을 샀다. 하층농민들로 구성된 동학도들을 ‘민당’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894년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내각과 박정양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경제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그의 잡세혁파 및 무토궁방세 혁파와 조세법정주의에 의거한 조세제도의 개혁은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어윤중은 온건개혁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개인적 성품은 매우 강직하고 담대하여서, 갑오경장중에는 고종과 민비의 작은 요청도 법률에 어긋난 것은 모두 거절하였으며, 일제측도 300만원의 차관을 일본화폐로 주려고 제의하였다가 은(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당하였다. 유명한 갑오경장의 재정‧경제부문의 전반적 대개혁은 그가 중심이 되어 단행된 것이었다.
6. 아관파천 후 실각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의하여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자 대부분의 각료들이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윤중김홍집과 함께 일본으로의 망명을 거절하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어윤중은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고향으로의 피란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경기도 용인군을 지날 때 산송문제(山訟問題)로 사원을 품은 향반배가 자기의 머슴을 동원하여 기습하여서 1896년 2월 17일 49세의 나이로 피살되었다.

1910년에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동래어사서계(東萊御史書啓)』『수문록(隨聞錄)』『서정기(西征記)』『간독요초(簡牘要抄)』『종정연표(從政年表)』 등이 있다. 근년에 『어윤중전집』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高宗紀事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魚允中全集(亞細亞文化社, 1979)

[이미지]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