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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양(柳濟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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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낙중(洛中)
호(號)난사(蘭榭)
호(號)방옹(放翁)
호(號)쌍봉(雙峰)
호(號)안선(岸船)
호(號)이산(二山)
생년1846(헌종 12)
졸년1922
시대조선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문학 > 시‧시조인
유견용(柳見龍)
조부유억(柳億)
증조부유덕호(柳德浩)
고조부유이주(柳爾胄)
출신지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운조루(雲鳥樓)
저서『쌍봉시집(雙峰詩集)』
저서『이산시고(二山詩稿)』
저서『시언(是言)』

[상세내용]

유제양(柳濟陽)
1846년(헌종 12)∼1922년. 조선 말기 시인. 자는 낙중(洛中)이고, 호는 난사(蘭榭)방옹(放翁)안선(岸船)쌍봉(雙峰)이산(二山) 등이 있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운조루(雲鳥樓)의 5대 주인이다.

고조부는 운조루(雲鳥樓)의 창건주 유이주(柳爾胄)이다. 증조부는 유이주의 사촌 동생의 아들로서 운조루의 공사를 담당했으며, 후에 유이주에게 양자로 들어간 수분실(隨分室) 유덕호(柳德浩)이다. 조부는 유덕호의 조카로서 유덕호에게 양자로 들어간 유억(柳億)이고, 부친은 유억의 맏아들인 유견용(柳見龍)이다. 형제로는 동생 유제영(柳濟永)이 있다.

6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아래서 자라면서 숙부 유택선의 보살핌으로 일찍 글공부를 시작했다. 10대에 『효경(孝經)』『사서(四書)』『사기(史記)』 등을 읽었고, 그 후 한(漢)위(魏)당(唐)송(宋)중국의 저명한 시인들이 남긴 시를 보며 규칙이 엄격한 근체시를 익혔다.

그는 당시 구례에서 활동하던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와 그의 세 아들인 봉주(鳳洲) 왕사각(王師覺)소금(素琴) 왕사천(王師天)소천(小川) 왕사찬(王師瓚), 매천(梅泉) 황현(黃玹)해학(海鶴) 이기(李沂)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재산도 많았지만 시인으로서의 재능과 포용력 등으로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좌장(座長)의 역할을 하였다.

1869년(고종 6)에는 24세의 나이로 유씨 문중 사람들을 모아 운조루 뒤 물가에서 시회(詩會)를 결성하였다. 1870년에는 왕사각을 비롯한 10여 명의 시인들과 함께 일기회(一器會)라는 시회를 결성하였고, 1900년에는 황현왕사찬 등과 함께 ‘남호아집(南湖雅集)’이라는 시회를 결성하는 등 7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적극적인 시회 활동을 펼치며 1만여 수의 시를 지었다.

부인과의 사이에 유영환(柳永桓), 유인환(柳麟桓), 유봉환(柳鳳桓), 유구환(柳龜桓), 유용환(柳龍桓)의 5남을 두었다. 이 중 3남 유구환은 자녀가 없었던 동생 유제영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쌍봉시집(雙峰詩集)』『이산시고(二山詩稿)』가 있다. 그는 또 부친이 사망한 1851년부터 쓰기 시작한 『시언(是言)』이라는 일기를 남겼고, 1922년 그가 죽은 뒤부터는 그의 손자 유형업(柳瀅業)이 죽기 전인 1936년까지 『기어(紀語)』라는 기록물을 남겼다. 조손(祖孫)이 80년간 하루도 빠짐 없이 기록한 이 생활 일기는 조선 말기부터 근대화 시기까지의 사회풍습과 농촌생활 연구 등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구례군지
구례운조루(국립 민속박물관, 1988)
매천시파 연구(김정환,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承政院日記
운조루(http://unjoru.com/)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