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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하(李重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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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후경(厚卿)
호(號)탄재(坦齋)
생년1846(헌종 12)
졸년1917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인식(李寅植)
저서『규당문집』
저서『감계전말(勘界顚末)』
저서『감계일기(勘界日記)』

[상세내용]

이중하(李重夏)
1846년(헌종 12)∼1917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탄재(坦齋). 현감 이인식(李寅植)의 아들이다.

좌랑(佐郞)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德玉)가원계(賈元桂)진영(秦瑛) 등과 함께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심사한 뒤, 국경문제를 놓고 담판하였으나 청국측과의 견해차와 그들의 강압적 태도로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에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하였는데, 청국측은 조선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였으나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 하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4년 외무부협판‧의정부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선무사(慶尙道宣撫使)영월영천안핵사(寧越永川按覈使)경상도위무사(慶尙道慰撫使)로 진압에 앞장섰다.

이해말에 김홍집내각의 내무부협판이 되어 갑오농민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듬해 김홍집내각의 붕괴와 지방제도개편으로 대구부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재직시 을미의병의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는데, 그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요구에 의하여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투표로 11명의 대신후보자를 선출하였을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3년 외무부협판 칙임2등(勅任二等)이 되어 문헌비고찬집당상(文獻備考纂輯堂上)을 맡았다.

그뒤 평안남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합병을 주장하자, 민영소(閔泳韶)김종한(金宗漢) 등과 함께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하여 그해 12월 5일 원각사(圓覺社)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의 부당성을 공격하였다.

또, 1910년 규장각제학으로 한일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지방관리 재직시 청백염직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규당문집』『감계전말(勘界顚末)』『감계일기(勘界日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官報
大韓帝國官人履歷書
陰晴史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집필자]

오세창(吳世昌)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