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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金奭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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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소(景召)
호(號)오천(梧泉)
생년1843(헌종 9)
졸년1910(융희 4)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석진(金奭鎭)
1843년(헌종 9)∼1910년. 조선 말기의 문신‧항일우국지사.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친부(宗親府)벼슬을 거쳐 사과(司果)전적(典籍) 등을 역임, 홍문관의 관직을 지내고, 지평(持平)장령(掌令)사성(司成)사간(司諫) 등 청요직(淸要職)에 있다가 호조형조병조이조참의에 이어 한성부의 좌‧우윤호조이조형조공조참판,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광주부유수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 이어 비서원경(秘書院卿)장례원경(掌禮院卿)귀족원경(貴族院卿) 등을 거쳐 190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해 1월 22일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하였는데, 그 상소문에서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으로 폐기하게 되어 있으니 외부대신을 불러 여러 외국공사에게 성명을 내고 매국역도들을 주살하여 국헌을 바로잡고 인민을 생지옥에서 구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고 시일이 지연되자 다시 상주하기를, 매국노들과 같이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열에 설 수 없으니 의효전향관(懿孝殿享官)의 직을 물러나겠다고 하였는데, 당시 향관의 열에 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있었다.

조병세(趙秉世)가 조약을 반대하며 순사하자 조상갔다가 오는 길에 남대문 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사서 간직하고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일사보국할 결심을 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었는데, 일제는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이를 치욕으로 느끼고, 1910년 9월 8일 간직하였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出版部, 1971)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編, 1910)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대표명김석진(金奭鎭)
석진(奭鎭)
성명김석진(金奭鎭)
경소(景召)
오천(梧泉)

명 : "석진(奭鎭)"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