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명(李根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DFCBA85B1840X0 |
자(字) | 순구(舜九) |
생년 | 1840(헌종 6)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의(全義) |
활동분야 | 관료 > 대신 |
부 | 이시민(李時敏) |
생부 | 이흥민(李興敏) |
공훈 |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
공훈 | 대훈위(大勳位)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근명(李根命)
1840년(헌종 6)∼미상. 조선 말기의 대신‧친일파.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순구(舜九). 판서 이흥민(李興敏)의 아들로 공조판서 이시민(李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859년(철종 10) 진사, 1871년(고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을 거쳐 1874년 통정대부에 승진하였다.
1880년 성균관대사성, 이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1886년 이조참판, 1888년 주차천진독리통상사무(駐箚天津督理通商事務)가 되었다.
1892년 가의대부에 오르고, 1894년 의주부윤‧좌승지를 거쳐, 1895년 궁내부특진관‧춘천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96년 평안남도관찰사, 1897년 영선사장(營繕司長)에 재임중 자헌대부에 오르고, 다시 궁내부특진관, 이듬해 비서원경‧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내부대신, 1899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시종원경을 거쳐 장례원경으로 있으면서 정헌대부에 오르고 홍문관학사가 되었다.
1900년 다시 시종원경, 이듬해 태의원경(太醫院卿), 190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903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특진되었다.
1903년부터 190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의정부의정이 되어 태의원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하고 영돈녕부사에 전임되었다.
1905년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으며, 1906년 봉상사도제조(奉常司都提調)‧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1907년 대훈위(大勳位)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으며, 규장각지후관(奎章閣祇候官)이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병탄된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1859년(철종 10) 진사, 1871년(고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을 거쳐 1874년 통정대부에 승진하였다.
1880년 성균관대사성, 이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1886년 이조참판, 1888년 주차천진독리통상사무(駐箚天津督理通商事務)가 되었다.
1892년 가의대부에 오르고, 1894년 의주부윤‧좌승지를 거쳐, 1895년 궁내부특진관‧춘천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96년 평안남도관찰사, 1897년 영선사장(營繕司長)에 재임중 자헌대부에 오르고, 다시 궁내부특진관, 이듬해 비서원경‧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내부대신, 1899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시종원경을 거쳐 장례원경으로 있으면서 정헌대부에 오르고 홍문관학사가 되었다.
1900년 다시 시종원경, 이듬해 태의원경(太醫院卿), 190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903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특진되었다.
1903년부터 190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의정부의정이 되어 태의원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하고 영돈녕부사에 전임되었다.
1905년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으며, 1906년 봉상사도제조(奉常司都提調)‧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1907년 대훈위(大勳位)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으며, 규장각지후관(奎章閣祇候官)이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병탄된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高宗紀事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問題硏究會, 1910)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問題硏究會, 1910)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명 : "근명(根命)"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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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