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현석운(玄昔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04C11DC6B4B1837X0
자(字)덕민(德民)
생년1837(헌종 3)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천녕(川寧)
활동분야외교 > 역관
현학주(玄學周)
처부최덕연(崔悳淵)

[상세내용]

현석운(玄昔運)
1837년(헌종 3)∼미상. 조선 말기의 역관. 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덕민(德民). 현학주(玄學周)의 아들이며, 처는 최덕연(崔悳淵)의 딸이다.

22세 때인 1858년(철종 9) 식년역과(式年譯科)에서 왜학(倭學)전공으로 합격하여 역관의 길로 들어섰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지면서 대일정책의 변화가 일어나자, 그동안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수행해왔던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은 이듬해 8월에 유배당하고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의 대일정책의 변화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이 1875년 4월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벌일 당시 일본측과의 교섭을 맡았으며, 1876년 1월 일본과의 수교를 위한 강화도회담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대원군으로부터 강화에 반대하는 서한을 받아 접견대관 신헌(申櫶)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인 1876년 4월 4일에는 수신사 김기수(金綺秀)를 수행하여 당상역관이 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해 10월에 부산훈도판찰관(辦察官)으로 개칭되자 판찰관직을 맡았으며, 1878년 부산해관이 설치된 이후 관세권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교회(敎誨)직장(直長)의 직을 거쳐 1898년 7월에는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되었다.

1903년 2월에 농상공부협판탁지부협판을 거쳐 10월에는 수륜원부총재(水輪院副摠裁)가 되었다.

1906년 6월 봉상사제조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에 훈2등을 수여받았다. 품계는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韓國史講座―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1)
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李成茂‧崔珍玉‧金喜福編,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近代日鮮關係の硏究(田保橋潔, 朝鮮總督府中樞院, 1940)

[집필자]

박맹수(朴孟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