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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宋秉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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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화옥(華玉)
호(號)연재(淵齋)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836(헌종 2)
졸년1905(광무 9)
시대조선후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학 > 문인
출생지충청남도 회덕(懷德)
저서『근사속록(近思續錄)』
저서『무계만집(武溪謾輯)』
저서『연재집』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관련정보]

[상세내용]

송병선(宋秉璿)
1836년(헌종 2)∼1905년. 조선 말기의 문인‧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연재(淵齋). 충청남도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송달수(宋達洙)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송달수가 죽은 뒤 가학(家學)이 기울어갈 것을 염려하여 더욱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송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하는 여가에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송시열 등 거유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1878년(고종 15)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뒤 고종이 은사를 베풀고자 하여 높은 관작으로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그때에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두문자정(杜門自靖)하였으며, 이듬해 옥주(沃州)의 산속 물가에 누벽정(樓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陞品)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洪氏)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그해 음력 12월 30일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1914년 영동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배향하였으며, 이는 1970년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불린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이 간행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梅泉野錄
續陰晴史
大韓季年史
騎驢隨筆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54)
忠淸北道誌(忠淸北道誌編纂委員會, 1975)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대표명송병선(宋秉璿)
병선(秉璿)
성명송병선(宋秉璿)
연재(淵齋)

명 : "병선(秉璿)"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東宮日錄v11秉璿呈單以爲招 徠恩命復降因廬反覆敎諭逈出尋常是豈賤臣所敢承當今宜復控哀籲以冀鐫斥而宿抱鳳風濕當夏添劇數
東宮日錄v16狀啓以爲秉璿呈單內猥以庸陋虛叨榮寵亦已有年矣今玆聖諭復出常例固當暴實冀蒙恩斥而宿痰添劇末由構思欲俟少間罙增逋慢具
春坊日記v10達曰明日書筵取稟答曰停○忠淸監司書目懷德呈以贊善宋秉璿呈單內秉璿以庸陋無狀尙未刊名於選籍招徠恩命復降于田廬之中反覆敎諭_出尋常是豈賤臣所敢承當前後陳列實出肝膈毫無矯
春坊日記v17書筵停○達曰明日書筵取稟答曰只晝講○忠淸監司書目沃川呈以贊善宋秉璿呈單內伏以秉璿以庸陋賤品名在選籍虛叨榮寵亦已有年矣常自悚縮若無容措今茲夢寐之外聖諭復出常例辭旨隆重實非可以施之於無
略紀便覽v1告全國人民書曰秉璿草野人也杜門讀書分義是守若其世道隆替惟副手梢工是恃今當國家垂亡人民滅劉之日旣不爲萬世開泰之功亦無以救
略紀便覽v1稱五賊欲害先生故保驕作轎護耳閉驕簾疾驅出西門外日兵乃以日服圍住且稱有勅令奪其佩刀及衣襟中藥物終夜嚴守秉璿歎曰吾爲豎子所紿翌朝舁載火車夜抵公州之太田驛日兵乃解歸遂入懷德之石村曰此吾先祖尤庵舊居卽吾死所召門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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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