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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金綺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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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지(季芝)
호(號)창산(蒼山)
생년1832(순조 32)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준연(金駿淵)
출신지서울
저서『일동기유(日東記游)』
저서『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

[상세내용]

김기수(金綺秀)
1832년(순조 3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 서울 출신. 김준연(金駿淵)의 아들이다.

1875년(고종 12)에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응교에 오르고,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음력 2월 22일 가자(加資)되어 통정(通政)에 올랐으며, 예조참의에 결함(結銜)하여 수신사로 임명되니 근대 대일교섭의 첫 사절이 되었다.

사절단원 76인을 인솔하고 4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 부산에서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에 승선,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고 5월 4일 고베(神戶)를 경유하여 5월 7일 요코하마(橫濱)에 입항하여, 일본 외무성 관리의 출영을 받고 특별열차편으로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그뒤 5월 27일 동경을 떠날 때까지 20일간 체류하면서 개화한 일본의 문물, 즉 전신과 철도의 가설, 군함과 대포의 제조를 비롯하여 군사‧기계‧학술‧교육 등의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그의 일본 견문기는 『일동기유(日東記游)』『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에 나타나 있다. 수신사 일행의 보고와 그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復命別單)은 고종민비, 그리고 척신(戚臣)과 조신(朝臣)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경 체류 당시 주일영국공사가 호의를 베풀어 면회하기를 요망하였으나, 구미외국사절과는 일체 접촉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1877년 황해도 곡산군수(谷山郡守), 1879년 덕원부사(德源府使), 1881년 대사성, 1883년 감리의주통상사무(監理義州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1893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을 때 황간(黃澗)청풍(淸風)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민란주모자를 엄형정배(嚴刑定配)하고 전황간현감 민영후(閔泳厚)와 전청풍부사 송병두(宋秉斗)의금부로 하여금 나문(拏問)하게 하였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

저서로 『일동기유』『수신사일기』가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日東記游
修信使日記
朝鮮名臣錄(李章薰, 京城, 1925)
開港期對日關係史硏究(趙恒來, 螢雪出版社, 1973)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대표명김기수(金綺秀)
기수(綺秀)
성명김기수(金綺秀)
계지(季芝)
창산(倉山), 창산(蒼山)

호 : "창산(蒼山)"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