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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기(劉鴻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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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규(聖逵)
호(號)대치(大癡)
호(號)여여(如如)
생년1831(순조 31)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양(漢陽)
활동분야사회 > 사상가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유홍기(劉鴻基)
1831년(순조 31)∼미상. 개화사상가, 개화운동의 지도자.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규(聖逵), 호는 대치(大致, 大癡)여여(如如). 서울 출신.
1. 가계와 수학
중인인 역관의 집안에 태어나 한의업(漢醫業)에 종사하였으며,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고,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였으며,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

이웃에 살고 있던 친우 오경석(吳慶錫)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다수의 신서들을 읽고 연구하여 국제정세의 변화와 서양의 제도‧문화를 알게 되어 오경석에 이어 1860년대에 일찍이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2. 개화파 가담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을 겪은 뒤에 서세동점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위기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급박하게 다가왔다고 판단하고, 오경석과 더불어 상의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서울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서, 그들이 형성한 개화사상과 오경석중국으로부터 구입해온 신서들을 교육하여 개화파를 형성하여서 나라의 일대혁신을 일으키는 혁신정치를 실행하게 하자고 합의하였다.

그와 오경석은 1869년(고종 6) 박규수(朴珪壽)평안도관찰사로부터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하자, 박규수에게 이 방법을 제안하여 의견의 합일을 보았다.

이에 1869년말 개화사상의 세 비조인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개화사상의 동지로 완전히 결합하여 1870년초부터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로서의 초기개화파(개화당)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박규수오경석과 더불어 초기개화파의 스승이며 지도자가 되었다.
3. 개화파의 지도자
강화도조약 이듬해인 1877년에 박규수가 죽고, 또 1876년 4월에 오경석이 병석에 누웠다가 1879년에 죽게 되자, 개화사상의 세 비조 중에서 그만이 남아 청년개화당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의 직접적 지도를 받은 인물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백춘배(白春培)정병하(鄭秉夏)이종원(李淙遠)이정환(李鼎換)박제경(朴齊絅)이동인(李東仁)탁정식(卓挺植) 등이었다. 김옥균은 그의 지도와 영향으로 불교를 신앙하게까지 되었다.

그가 당대의 최고선각자이며, 당대의 뛰어난 청년개화당들이 모두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렀다.

개항 후 초기개화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고 정부에서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함에 따라, 정부가 행정기구를 개편하고 정리하기 위한 임시기관으로 1882년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여 어윤중(魚允中)을 책임자로 임명하였을 때, 그는 중인출신이었지만 이 기관의 부사용(副司勇, 五衛의 종9품직)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용(司勇, 정9품직)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관말직은 그의 경륜과 능력에 비추어보면 너무 보잘것없는 작은 직책이었으며, 그나마도 감생청은 수구파의 반대로 1년 만에 폐지되어 그는 관직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4. 갑신정변 주도
가그는 임오군란 후 청나라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서울에 청군을 상주시키고, 이를 배경으로 조선의 자주개화정책을 반대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며 조선을 실질적인 속방으로 만들려 하고, 새로이 러시아가 북방으로부터 압력을 가하여오자, 나라의 자주독립과 개화자강을 위한 방책을 김옥균박영효서광범윤치호(尹致昊) 등 청년개화당들을 통하여 국왕에게 여러 차례 헌책하였다.

그러나 친청수구파들의 방해로 개화혁신정책은 채택되지 않고 나라는 날로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자, 마침 안남문제로 청불전쟁의 전운이 감돌아 서울에 주둔한 청군이 반으로 감축되더니 1884년 9월에는 청불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회로 포착하여, 김옥균을 중심으로 개화당의 정변을 일으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한 뒤 일대 혁신정책을 단행해서 나라를 구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마침 주조선 일본공사가 1884년 10월 30일 귀임한 뒤 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해오면서 정변을 위한 자금과 일본공사관 호위병을 빌려줄 의사를 보이자, 일본의 힘을 이용해서 개화당의 부족한 힘을 보충하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할 것을 개화당 제자들에게 권고하였다.

그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 지도자들을 처단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여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의 실시를 위한 혁신정강(革新政綱)을 공포하고 대대적인 혁신정치를 시작하려 하였다.
5. 사망에 대한 추측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과, 정변에 개입한 일본군의 배신 및 국민의 지지결여로 12월 6일 실패하여 개화당의 신정부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 등을 비롯한 수많은 개화당 인사들이 청군과 수구파에게 참살당하였다.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였음을 알게 되자 12월 6일 밤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뒤 그의 행방에 대하여 온갖 이야기가 떠돌았으나, 10년 후 갑오경장 때 그의 제자들이 집권하여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갑신정변의 지도자들을 모두 복권시켰을 때에도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며, 1908년 개화파 인사들이 주동이 되어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열었을 때에는 그를 순국한 애국자로 추도한 것을 보면, 그는 갑신정변 실패 직후 수구파들이 조정의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화당 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할 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開化黨의 形成(李光麟, 省谷論叢 3, 1972)
숨은 開化思想家 劉大致(李光麟, 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金玉均의 開化思想(愼鏞廈, 東方學志 46‧47‧48合輯, 1985)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