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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吳慶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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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거(元秬)
호(號)진재(鎭齋)
호(號)천죽재(天竹齋)
생년1831(순조 31)
졸년1879(고종 16)
시대조선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사회 > 사상가
오응현(吳膺賢)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오경석(吳慶錫)
1831년(순조 31)∼1879년(고종 16). 조선왕조 19세기 중엽의 개화사상의 비조이며, 역관‧서화가‧금석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 서울 출신.
1. 가계와 수학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인 오응현(吳膺賢)의 아들이고,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의 아버지이다.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고,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2. 개화사상 형성
1846년(헌종 12) 역과(譯科)에 합격하고, 1853년(철종 4) 4월 북경행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서 이듬해 3월까지 머무르며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중국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뒤 전후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新書)들을 일찍이 구입해가지고 귀국하여 연구, 1853∼1859년경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 때 중국 북경에 가서 서양열강의 근대적 무력과 경제력 앞에 붕괴되어가고 있는 중국의 참상을 관찰하고, 조선에도 곧 서양열강의 침입에 의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절감하여 구입해온 신서들을 그의 친우 유홍기(劉鴻基)에게 주어 읽게 하고, 자기의 새로운 개화사상을 개진하여 유홍기도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하였다.

또한, 박규수(朴珪壽)가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에 대한 조선조정의 위문사(慰問使)의 부사로 중국에 갔다가 큰 충격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박규수의 개화사상 형성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3. 병인양요 후 청국과 외교활동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남에 즈음하여 대원군에 의하여 긴급히 북경에 파견되어 양요에 대한 중국측과의 연락 및 대책수립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일찍이 친교를 맺었던 청나라조정의 실무관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여 자료를 수집한 뒤, 조선을 침공한 프랑스동양함대는 재정이 부족하여 무역상들로부터 군비를 차입하였고, 침공함대에도 군량을 3개월분밖에 적재하지 못하였으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면서 단기의 정면 결전을 하지 말고 지구전을 전개하여 3개월만 싸우면 프랑스침공함대는 패퇴할 것이라는 건의안을 대원군에게 제출하여 프랑스침공함대를 격퇴하는 전략수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밖에도 프랑스동양함대의 조선침공 직전의 주청(駐淸)프랑스공사관과 청나라 총리아문(總理衙門)사이의 왕복문서를 중국인 친우를 통하여 필사하여서 본국에 보내었으며, 청나라의 실무급 관료들을 만나 병인양요에 대한 그들의 의견과 대처방안들을 수집하여 대원군에게 제출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4. 개화파의 조직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을 겪은 뒤에는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유홍기에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서울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서 그가 중국으로부터 구입해온 신서들과 그들이 형성한 개화사상을 교육하고 발전시켜서 개화파를 형성하여 나라에 일대혁신을 일으키는 방법을 제의하였다.

1869년 박규수평안도관찰사로부터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하자 박규수에게도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발탁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해서 개화파를 형성하여 나라의 정치를 크게 혁신하여서 자주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서양열강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1869년말 개화사상의 세 비조인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개화사상의 동지로 완전히 결합하여 1870년초부터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로서의 초기 개화파(개화당)가 형성되었다.

이에 오경석유홍기박규수와 함께 초기 개화파의 스승이며 지도자가 되었다.
5. 신미양요 때의 활동
오경석은 병인양요 이후에는 기회를 보아 자주적 개국을 실현하고 자주개화정책을 실시하여 나라를 근대국가로 건설하여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고, 민족주체성이 강한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는 기간에 준비를 갖추어 개국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미국이 1871년 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개항을 요청해오자 이것이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대원군에게 미국이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와서 통상을 요청하므로 이 기회에 미국과 외교를 열고 개항을 단행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거절당하고 오히려 ‘개항가’라고 지목당하였다.

그 이후부터는 그의 건의가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대원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원군과의 친근한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군함이 개항을 요구하여 함포사격을 하며 무력행사를 하여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단호하게 이에 대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미양요의 뒤처리와 관련하여 1872년 조선조정이 박규수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파견할 때에는 수역(首譯)으로 지명되어 북경에 가서 다시 신미양요의 뒤처리와 관련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6. 운요호사건과 외교활동
일본이 1875년에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키고, 뒤이어 1876년 1월에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찾아와 무력침공의 위협을 하면서 개국통상을 요구하는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조선조정(당시 민비집권)에 의하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외교활동의 업적에 의거하여 다시 발탁되어 문정관에 임명되었다.

일본측이 조선조정의 승낙 없이 강화에 상륙하려 하자 국제관례에 없는 일이라고 일본측에 강경하게 항의하고, 조선조정에 대해서도 이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무력위협에 대응할 실력이 없던 조선조정의 무능무력으로서는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없었다.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여, 1876년 2월 강화부의 연무당에서 근대 최초의 한일회담을 하면서 세 차례에 걸친 회담도중에 간헐적으로 함포의 위협사격을 하고 그들이 조작한 운요호사건의 책임을 도리어 조선측에게 떠넘기어 심하게 추궁하여 회담에 유리한 위치를 장악하려 하자, 조선측 정사 신헌(申櫶), 부사 윤자승(尹滋承)의 막후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의 함포위협을 즉각 중지하도록 항의하게 하였다.

일본측의 운요호사건을 구실로 한 공격에는 중국신문에 보도된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을 들어 반격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의 국기사용에 대응하여 조선의 국기제작과 사용을 건의하였다.
7.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에서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조정에서는 개국문제를 놓고 세가지 견해를 놓고 집단이 형성되어 심각하게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 첫째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 등 원로대신들과 대원군의 견해로서, 강경하게 척화론을 주장하고, 병인양요‧신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일전을 벌여서라도 일본의 요구를 강경하게 거절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요, 둘째는 민규호(閔奎鎬)민비(閔妃) 등의 주장으로서, 청국의 개국권고에 따라 주견없이 개국을 주장하는 의견이요, 셋째는 박규수오경석 등의 견해로서, 일본의 무력위협을 받으며 개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세계대세로 보아 조만간 개국은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번의 승산이 없는 전쟁을 피하고, 최대한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불가피하게 개국을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오경석은 당시의 민비정권으로서는 군함 5척을 끌고 온 일본과 무력으로 대결하여 승리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최대한으로 사태를 수습하면서 개국한 다음 대응책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의 의견을 박규수에게 개진하여 개국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오경석을 운현궁에 불러들여 개국을 거절하고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지시하였으며, 강화도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심하게 힐책하였다.

그는 민비정권으로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여보아야 승리하기 어렵고 사태가 더욱 불리하게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으며,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결코 나라를 구하는 방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으므로 끝까지 대원군의 주장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1876년 2월 26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는 그가 바란 대로 되지 않았으나, 일본의 극악한 무력위협 속에서도 사태가 전쟁으로 치달아 준비없는 조선이 더 큰 굴욕을 받지 않고 개국을 하려고 사태수습에 노심초사하면서 활동하던 중에 과로하여, 일본측이 군함을 이끌고 돌아간 직후인 1876년 4월에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사이 오경석은 그의 외교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869년에는 통정대부, 1873년에는 가선대부, 1875년에는 자헌대부, 1877년에는 숭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의 직함을 받았다. 강화도조약 직후 병석에 누운 뒤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8. 취미와 저술
서화의 수집에 취미를 가져 중국과 국내에서 방대하고 희귀한 서화들을 수집, 수장하였으며, 매화를 잘 그려 일가를 이루었고, 예서(隷書)와 전자(篆字)를 잘 썼다.

금석학에도 일가를 이루어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지었으며, 각지의 비석과 유적을 두루 답사하였다.

저서로는 『삼한금석록』 외에 『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양요기록(洋擾記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吳慶錫의 開化思想과 開化活動(愼鏞廈, 歷史學報 107, 1985)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