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형(姜文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15BB38D615B1831X0 |
자(字) | 덕보(德輔) |
호(號) | 난포(蘭圃) |
생년 | 1831(순조 3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진주(晉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저서 | 『일본견문사건』 |
저서 | 『일본공무성시찰기』 |
[상세내용]
강문형(姜文馨)
1831년(순조 31)∼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보(德輔), 호는 난포(蘭圃).
1869년(고종 6)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2년에는 회환진하 겸 사은사(回還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 박규수(朴珪壽), 역관 오경석(吳慶錫)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4년에는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전정(田政)‧동포(洞布)‧사창(社倉)‧수령광관(守令曠官) 등의 폐단을 별단(別單)에서 일일이 고하였다.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약 70일 동안 일본의 군사‧교육‧행정‧공장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해 정부기구 개편 때 감공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개화정책에 비교적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부승지의 직에 있으면서 정변 후 승정원의 김옥균일파 비난에 동참하였다.
1885년에는 예방승지(禮房承旨), 1887년에는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 1893년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와 쓴 『일본견문사건』과 『일본공무성시찰기』가 규장각도서에 있다.
1869년(고종 6)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2년에는 회환진하 겸 사은사(回還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 박규수(朴珪壽), 역관 오경석(吳慶錫)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4년에는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전정(田政)‧동포(洞布)‧사창(社倉)‧수령광관(守令曠官) 등의 폐단을 별단(別單)에서 일일이 고하였다.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약 70일 동안 일본의 군사‧교육‧행정‧공장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해 정부기구 개편 때 감공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개화정책에 비교적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부승지의 직에 있으면서 정변 후 승정원의 김옥균일파 비난에 동참하였다.
1885년에는 예방승지(禮房承旨), 1887년에는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 1893년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와 쓴 『일본견문사건』과 『일본공무성시찰기』가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大韓季年史
日省錄
國朝榜目
大韓季年史
[집필자]
윤경로(尹慶老)
대표명 | 강문형(姜文馨) |
성명 | 강문형(姜文馨) |
성명 : "강문형(姜文馨)"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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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