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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응(李明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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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의(景誼)
생년1827(순조 27)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휘중(李彙重)
처부홍재학(洪在鶴)
외조부어재찬(魚在瓚)

[상세내용]

이명응(李明應)
1827년(순조 27)∼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의(景誼). 참판 이휘중(李彙重)의 아들이며, 모친은 어재찬(魚在瓚)의 딸이다. 아내는 홍재학(洪在鶴)의 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촌동생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민승호(閔升鎬)와 함께 홍문관교리에 파격적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식년문과의 충청도경시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식년시의 초시는 관찰사가 주관하기로 예정되었으나 대원군의 심복으로 경시관이 모두 교체되었다.

그뒤 순조롭게 승진하여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71년에는 종정경이 되어 전주이씨가 아닌 자들이 포함되어 말썽이 된 『선원보략(璿源譜略)』의 개수를 담당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도 계속 종정경으로 남아 있다가 1877년 다시 부제학으로 옮겼다. 큰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유행하던 다음해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2년반 동안 재임하면서 치적이 있어 한 차례 연임되기도 하였다.

1881년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림들의 상소가 있은 뒤 민씨일파를 중심으로 군권이 개편될 때 도총부도총관에 특별히 발탁되었다.

또, 이재선(李載先)사건이 일어나자 형조판서가 되어 추국(推鞠)에 참여하였다. 임오군란 후 피신하였던 민비가 환어할 때 배종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93년 판의금부사에 이르기까지 민씨정권하에서 이조판서형조판서지종정경 등 요직을 지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장영민(張泳敏)
대표명이명응(李明應)
성명이명응(李明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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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