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철(趙秉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BCD1CCA0B1826X0 |
자(字) | 치전(稚田) |
생년 | 1826(순조 26)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풍양(豊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발영(趙發永) |
생부 | 조대영(趙大永) |
[상세내용]
조병철(趙秉轍)
1826년(순조 26)∼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전(稚田). 조대영(趙大永)의 아들로 조발영(趙發永)에게 입양되었다.
유학(幼學)으로서 1870년(고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같은해 옥당(玉堂)에서 도참설(圖讖說)을 유포한 정만식(鄭晩植)의 유배를 주장하는 연차(聯箚)를 올렸을 때 수찬으로 참여하였다.
1879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1881년 이조참의, 1884년 병조참의에서 특별히 발탁되어 공조참판에 올랐다.
188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된 이후 해주 등지의 진결(陳結)‧폐결(廢結)‧허결(虛結)의 세금을 탕감하여 주고 이러한 진전(陳田)을 개간한 뒤에 징세하도록 하여 궁민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장계를 올려 왕의 승낙을 받았다.
또, 장산(長山)이남북의 해운이 매우 불편하므로 세곡 대신 세전(稅錢)을 내도록 하는 등 선정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 1889년 인천거류 일본상인들이 곡물을 구입, 인천으로 향하려다가 그의 방곡령 실시로 운반이 정지되었다.
이에 일본상인들은 인천감리서에 가서 관찰사가 아무런 통고도 없이 단독으로 방곡령을 실시하였으니 해결하여달라고 호소하여, 감리서는 곡물수송을 허용하라는 통첩장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항장이면 조약을 준수할 의미가 있지만, 황해도에는 개항장이 없으므로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를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공사가 외아문독판 조병직(趙秉稷)에게 항의하여 해제명령을 내림으로써 비로소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상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한일간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였다.
1889년 특별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발탁되어 내직으로 들어온 이후 한성부판윤‧예조판서‧대호군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사후에는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이해 동지사행의 정사로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인하여 이규영(李珪永)으로 교체되었다.
유학(幼學)으로서 1870년(고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같은해 옥당(玉堂)에서 도참설(圖讖說)을 유포한 정만식(鄭晩植)의 유배를 주장하는 연차(聯箚)를 올렸을 때 수찬으로 참여하였다.
1879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1881년 이조참의, 1884년 병조참의에서 특별히 발탁되어 공조참판에 올랐다.
188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된 이후 해주 등지의 진결(陳結)‧폐결(廢結)‧허결(虛結)의 세금을 탕감하여 주고 이러한 진전(陳田)을 개간한 뒤에 징세하도록 하여 궁민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장계를 올려 왕의 승낙을 받았다.
또, 장산(長山)이남북의 해운이 매우 불편하므로 세곡 대신 세전(稅錢)을 내도록 하는 등 선정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 1889년 인천거류 일본상인들이 곡물을 구입, 인천으로 향하려다가 그의 방곡령 실시로 운반이 정지되었다.
이에 일본상인들은 인천감리서에 가서 관찰사가 아무런 통고도 없이 단독으로 방곡령을 실시하였으니 해결하여달라고 호소하여, 감리서는 곡물수송을 허용하라는 통첩장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항장이면 조약을 준수할 의미가 있지만, 황해도에는 개항장이 없으므로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를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공사가 외아문독판 조병직(趙秉稷)에게 항의하여 해제명령을 내림으로써 비로소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상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한일간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였다.
1889년 특별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발탁되어 내직으로 들어온 이후 한성부판윤‧예조판서‧대호군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사후에는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이해 동지사행의 정사로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인하여 이규영(李珪永)으로 교체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日案
防穀令事件(唐澤たけ子, 朝鮮史硏究論文集 6, 1969)
國朝榜目
淸選考
日案
防穀令事件(唐澤たけ子, 朝鮮史硏究論文集 6, 1969)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대표명 | 조병철(趙秉轍) |
성명 | 조병철(趙秉轍) |
성명 : "조병철(趙秉轍)"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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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