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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진(尹成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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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도(稚道)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826(순조 26)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응규(尹應奎)

[상세내용]

윤성진(尹成鎭)
1826년(순조 26)∼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치도(稚道). 윤응규(尹應奎)의 아들이다.

1860년(철종 11) 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주천(注薦)되어 정언지평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철종실록낭청(哲宗實錄郞廳)이조참의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80년(고종 17) 4월 그해 2월에 파방된 증광감시가 다시 실시되자 제2소 시관(試官)이 되었다.

1882년 대원군의 명으로 임오군란의 수습을 위하여 제물포에 온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일행의 반접사가 되어 그 일행을 회유하여 서울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나, 하나부사는 1개중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하나부사대원군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칭병으로 사임, 그 요청을 회피하였다.

1885년 양주목사로 재임할 때 도결 혁파를 내세운 여주민란의 안핵사로 차하(差下)되었으나, 조사가 철저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4개월 뒤 다시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대원군청나라에서 환국하자 민씨정권이 임오군란의 죄인들을 처형하는 등 대원군을 억압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

또 1885년에도 대사헌이 되어 갑신정변의 여당으로 신기선(申箕善)윤웅렬(尹雄烈) 등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관파천 후 수구파 김병시(金炳始)의정(議政)이 되어 복고적 정책을 시행할 때 중추원1등의관에 취임하였다.

그뒤 광무연간에도 궁내부특진관홍문관학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東邦關係(渡邊修二郞, 1894)

[집필자]

장영민(張泳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