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덕(金炳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BCD1B355B1825X0 |
자(字) | 성일(聖一) |
호(號) | 약산(約山) |
시호(諡號) | 문헌(文獻) |
생년 | 1825(순조 25) |
졸년 | 1892(고종 29)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안동(安東[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흥근(金興根) |
조부 | 김명순(金明淳) |
저서 | 『속간고(續諫考)』 |
[상세내용]
김병덕(金炳德)
1825년(순조 25)∼1892년(고종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성일(聖一), 호는 약산(約山).
조부는 이조판서 김명순(金明淳)이며, 부친은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다.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가 된 뒤 안동김씨의 세도 아래 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이조참판‧공조판서‧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866년 대사헌, 1867년 이후에는 세 차례나 이조판서를 지냈다.
1879년 병조판서, 1880년 통리기무아문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에 오르고, 곧 이어 평안도관찰사‧수원부유수‧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가 되었다.
1884년 우의정으로 전환국(典圜局)의 혁파, 해외유학생의 소환 등 수구정책을 건의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해 좌의정이 되고, 뒤에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다.
1891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며, 청렴결백한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저서로는 『속간고(續諫考)』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부는 이조판서 김명순(金明淳)이며, 부친은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다.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가 된 뒤 안동김씨의 세도 아래 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이조참판‧공조판서‧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866년 대사헌, 1867년 이후에는 세 차례나 이조판서를 지냈다.
1879년 병조판서, 1880년 통리기무아문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에 오르고, 곧 이어 평안도관찰사‧수원부유수‧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가 되었다.
1884년 우의정으로 전환국(典圜局)의 혁파, 해외유학생의 소환 등 수구정책을 건의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해 좌의정이 되고, 뒤에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다.
1891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며, 청렴결백한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저서로는 『속간고(續諫考)』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金甌錄
梅泉野錄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金甌錄
梅泉野錄
[집필자]
최홍규(崔洪奎)
명 : "병덕(炳德)"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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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