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윤우석(尹宇錫)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4C6B0C11DB1824X0
개명(改名)윤우선(尹宇善)
자(字)보여(普汝)
생년1824(순조 2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윤치용(尹致容)

[상세내용]

윤우석(尹宇錫)
1824년(순조 24)~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보여(普汝)이고, 윤우선(尹宇善)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증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청주목사(行淸州牧使) 윤문동(尹文東)이고, 조부는 윤경열(尹慶烈)이다. 부친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윤치용(尹致容)이고, 생부는 형조판서(刑曹判書)‧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한 윤치정(尹致定)이다.

1858년(철종 9) 식년시 문과에 을과 5위로 급제하였고, 1860년(철종 11)에 한림권점(翰林圈點)‧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홍문록(弘文錄)‧도당회권(都堂會圈)에 선발되었다. 1862년(철종 13) 약원별겸춘추(藥院別兼春秋)로 승급되었고, 1867년(고종 4)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1874년(고종 11) 명릉(明陵)과 익릉(翼陵)에 친제(親祭)할 때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참여하여 승급되었으나, 다음 해 과거시험 난동과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877년(고종 14) 이조참판(吏曹參判)‧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883년(고종 20) 민치서(閔致序)와 직임을 바꾸어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재직하던 중 안악군수(安岳郡守) 김문현(金文鉉)이 고을 일을 잘 돌보지 못해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며 그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백령도(白翎島)의 백성들이 중국 상인을 살해하고 물품을 빼앗았다며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공조판서(工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등 고위관직에 제수되었다.

1896년(건양 1) 중추원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겸 시강원일강관(兼侍講院日講官)‧장례원경(掌禮院卿)‧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태의원경(太醫院卿)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