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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규(李承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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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사(公似)
생년1821(순조 21)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이민영(李敏榮)

[상세내용]

이승규(李承圭)
1821년(순조 21)~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공사(公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증조부는 이득일(李得一)이고, 조부는 이상황(李相璜)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제용감판관(行濟用監判官) 이민영(李敏榮)이다. 외조부는 윤정진(尹定鎭)이다. 처부는 김영석(金永錫)‧홍재응(洪在膺)이다.

1837년(헌종 3) 식년시에서 진사 3등 4위로 합격하였고, 1844년(헌종 10) 증광시에서 병과 8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7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44년 춘당대(春塘臺) 시취(試取)에서 부(賦)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었다. 1845년(헌종 11)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린 한림소시(翰林召試)에 뽑혔다. 1846년(헌종 12)에는 강제문신(講製文臣)에 선발되었고, 같은 해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어사(御使)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집의(執義) 이노규(李魯奎)‧헌납(獻納) 유안(柳晏) 등과 함께 중궁전(中宮殿)의 문후(問候)를 묻는 절차를 옛 법도처럼 생략하라는 하교가 있자 ‘아침에 부친의 안부를 물을 때 모친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은 정리(情理)라 할 수 없듯이 임금에게 문후를 여쭈면서 중궁전의 문후를 여쭙지 않는 것 또한 잘못’이라며 반대하는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렸다. 이 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이노규‧유안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1848년(헌종 14)에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搢紳譜
蔭案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憲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