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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李鎬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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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충백(忠伯)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821(순조 21)
졸년1901(광무 5)
시대조선후기
본관우봉(牛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식(李埴)
생부이섭(李)

[상세내용]

이호준(李鎬俊)
1821년(순조 21)∼1901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충백(忠伯). 이섭(李)의 아들로 이식(李埴)에게 입양되었다.

1864년(고종 1) 경과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0월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로 특제(特除)되었으며, 1865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여러 차례 소(疏)를 올리며 소임을 다하였다.

1867년에 예방승지(禮房承旨), 1870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라도 지방의 행정에 진력하여 외침에 대비한 성의 수보(修補)와 군사훈련에 주력하였다.

3년여의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872년 11월 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1874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시강원우빈객좌부빈객으로 세자의 교육을 맡기도 하였다.

1879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3년 병조판서가 되고 같은해 9월 판의금부사로 특탁(特擢)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직전인 1884년 6월에는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청나라에 다녀와 복명(復命)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885년 5월 예조판서를 거치고 그해 8월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홍문관제학 등을 두루 거쳤으며, 이듬해 2월에는 다시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그해 6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전라도에 이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함으로써 당대의 관리 중에서 지방 실정에 밝은 관리가 될 수 있었다.

1888년에는 공조판서예문관제학규장각제학판의금부사 등을 다시 역임하였다.

1889년에 이르러서는 판의금부사홍문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형조판서판의금부사, 1893년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6년에는 품계가 정1품에 오르고 규장원경 겸 왕태자궁일강관(奎章院卿兼王太子宮日講官)이 되었으며, 칙임관3등에 올랐다.

이듬해 중추원의장칙임관1등이 되었고, 1898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같은해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을 지냈으며, 1899년에는 금보전문서(金寶篆文書)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으로 재임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國朝榜目
高宗時代史 1∼5(國史編纂委員會, 1970‧1971)

[집필자]

박맹수(朴孟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