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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朴麟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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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구(仁九)
생년1820(순조 20)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박내겸(朴來謙)

[상세내용]

박인하(朴麟夏)
1820년(순조 20)~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인구(仁九)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증조부는 박천의(朴天儀)이고, 조부는 박선호(朴善浩)이며, 부친 호조참판(戶曹參判)‧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박내겸(朴來謙)과 모친 이장재(李長載)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은진현감(恩津縣監)‧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낸 박봉하(朴鳳夏)이고, 서제는 무과에 합격하고 강원좌도평해군수(江原左道平海郡守)를 지낸 박명하(朴鳴夏)와 박우하(朴羽夏)이다.

1849년(헌종 15) 식년시 진사 3등 40위로 합격하였고, 1850년(철종 1) 증광시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1852년(철종 3) 세도를 부리고 있다며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으로부터 비판을 받아 조사받고 있던 조병현(趙秉鉉)‧윤치영(尹致英) 등을 석방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관록(館錄)‧도당록(都堂錄)에 뽑혔다. 1851년(철종 2)에 채희재(蔡喜載)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인 이명섭(李明燮)을 추대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한 사건이 있었다. 2년 후인 1853년(철종 4)에 이명섭의 동생 이명혁(李明爀)과 관련자인 최봉주(崔鳳周)‧이규화(李奎和) 등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854년(철종 5) 전라우도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로서 전감사(前監司) 정최조(鄭最朝)‧전 전나주목사(前前羅州牧使) 조연명(趙然明)‧전 해남현감(前海南縣監) 권최환(權最煥)을 탄핵하였다. 1855년(철종 6)에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유치명(柳致明)에 대해 국청을 설치하고 실정을 알아낼 것을 청하였다. 1858년(철종 9) 이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 등에 임명되었고, 외관으로 경상좌도동래부사(慶尙左道東萊府使)‧평안남도영변대도호부사(平安南道寧邊大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1862년(철종 13)에 작헌례(酌獻禮)에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