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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목(洪淳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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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희세(熙世)
호(號)분계(汾溪)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816(순조 16)
졸년1884(고종 21)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종원(洪鍾遠)
조부홍현규(洪顯圭)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홍순목(洪淳穆)
1816년(순조 16)∼1884년(고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희세(熙世), 호는 분계(汾溪). 서울 출신.

홍현규(洪顯圭)의 손자로, 승지 홍종원(洪鍾遠)의 아들이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洪英植)의 아버지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수찬을 지내고, 1846년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다.

1849년 헌종이 죽자 빈전도감도청(嬪殿都監都廳)이 되고, 부사과를 거쳐 1858년(철종 9) 이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863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해에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4년(고종 1)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866년 이후 이조판서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867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869년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수구세력 강경파의 거두로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국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872년 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최익현(崔益鉉)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다른 대신 및 대간들과 함께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직후인 그해 11월 파직되었으나, 다음달인 12월 영돈녕부사직에 복직되고, 187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876년 일본이 통상을 요청하였을 때 척화론을 펼쳤으며, 1879년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였고,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년 3월 재차 영의정이 되었으며, 같은해 6월 임오군란으로 집권한 대원군 집정 하에서도, 그 직후 그가 실각하였을 때에도 영의정직에 계속 유임되었다. 이해 12월에 단행된 관제개혁 때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를 겸임하였으며, 1883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같은해 5월 총리대신을 겸직하였으며, 9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884년 아들 홍영식 등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하고 홍영식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이어 자살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國朝榜目
韓國史―最近世篇‧現代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1‧1963)
한국사 16(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1975)
韓國史講座―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1)

[집필자]

강진갑(康鎭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