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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춘희(具春喜)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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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지(元之)
생년1813(순조 13)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능성(綾城)
활동분야무신
구장화(具鏘和)

[상세내용]

구춘희(具春喜)
1813년(순조 13)~미상.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원지(元之)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부친은 구장화(具鏘和)이다. 외조부는 부사(府使) 이주풍(李周豊)이고, 처부는 박문환(朴文煥)이다.

1835년(헌종 1)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선전관(宣傳官)‧아장(亞將)‧통진부사(通津府使)‧우부승지(右副承旨)‧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51년(철종 2) 통진부사 재임 시절에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리지 못한 죄를 묻는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유안(柳晏)의 서계(書啓)로 인해 벌을 받았고, 1873년(고종 10) 병마절도사 재임 시절에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군대 양성을 위한 둔전(屯田) 설치와 방어할 성(城)을 높이 쌓는 작업이 진행중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계속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1874년(고종 11) 이미 녹용(鹿茸)과 사향을 바친 후창군(厚昌郡)이 평안북도로 새로 편입되었다하여 또 다시 봉진을 요청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시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후창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함경도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 조병세(趙秉世)로부터 고을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아 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武譜
哲宗實錄
高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