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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보(朴永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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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백(星伯)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808(순조 8)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종악(朴鍾岳)
생부박종림(朴鍾林)
외조부오지수(吳趾秀)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박영보(朴永輔)
1808년(순조 8)∼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백(星伯). 서울 출신. 박종림(朴鍾林)의 아들로 박종악(朴鍾岳)에게 입양되었고, 모친은 오지수(吳趾秀)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직장(直長)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6년 평안도청북암행어사가 되어 강계부사 윤우현(尹寓鉉) 등 다수의 수령이 그의 서계에 따라 처벌받았다.

1849년에는 산릉도감(山陵都監)도청사직(都廳司直)으로 활동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853년(철종 4)‧1854년‧1859년에 걸쳐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1861년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사(冬至使)부사청나라에 다녀왔다.

1864년(고종 1)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임명되고 1865년‧1866년에도 대사헌을 지내며 고종에게 언로(言路)를 열어 충언을 듣고 절검(節儉)으로 애민(愛民)할 것을 간언하였다.

1867년 영선군(靈善君)이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다. 다시 1869년 형조판서를 거쳐 같은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경기도관찰사 재직 때 환곡제의 정비에 노력하고 효행을 권장하였으며, 군기(軍器)의 보수에도 힘썼다.

또한, 실농(失農)‧실업자의 진휼(賑恤)에 관심을 쏟았고 장시(場市)의 상도의를 확립하기 위하여 세력가를 처벌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추천으로 잉임(仍任)되었다.

재임기간중 신미양요가 발생하여 이의 대처에 노력하였고, 양요 이후에는 해안 요충지의 방비를 위하여 인천부(仁川府)에 포과(砲科)를 설치하여 매월 과시(課試)를 보아 거수(居首) 1인을 매년 뽑아 등용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1872년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남긴 글로는 신미양요 당시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과 함께 올린 「역진미국병선자요정형자문략(歷陳美國兵船滋擾情形咨文略)」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대표명박영보(朴永輔)
영보(永輔)
성명박영보(朴永輔)

명 : "영보(永輔)"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爛抄v6爲灾矣上曰予爲宿所故有此特敎矣仍令坡牧進前上曰有所下敎於道臣矣該牧亦爲相議指處申奭熙曰謹當悉心奉行矣永輔曰今此諸般下敎俱是爲民德意譪然今日筵說頒布朝紙使小民咸知亦使奉行之地藉手顯颺恐好敢達上曰卿言甚好今日
爛抄v6民力且伏奉大院君別飭自臣營亦分遣校吏探察諸結所別無爲弊之端矣上曰輦路民情見甚遑急故昨有傳敎矣果見之乎永輔曰謹已奉覽矣各邑賑政行將爲茅五巡飢民輩皆賴此保命昨秋離散之民亦聞還風集追付飢戶方此感頌聖德未有涯量今
爛抄v6使小民咸知亦使奉行之地藉手顯颺恐好敢達上曰卿言甚好今日筵說頒布朝紙可也仍敎曰另爲申飭於吏輩期有實效也永輔曰謹當悉心對揚矣黔巖碑閣所小駐
爛抄v6邑飢民今年軍錢之特爲蠲減尤是逈出格外民情之欣歡蹈舞如是(在)目覩臣亦實不勝攢祝之忱矣上曰期有實效可也永輔曰謹當與各該倅到底詳審宣揚德意矣上曰未時路傍見有民家燒燼處矣似以不滿五戶不爲啓聞矣結搆奠接之方營邑爛
爛抄v6各該倅到底詳審宣揚德意矣上曰未時路傍見有民家燒燼處矣似以不滿五戶不爲啓聞矣結搆奠接之方營邑爛商措處也永輔曰民家被燒聞甚矜惻果以定式所拘不得修啓矣謹當本倅相議捐處俾爲安接而恩敎至此民當感泣忘其爲灾矣上曰予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2-15[고종실록] 1888년(고종 25년) 11월 7일조를 참고하여 시호 문정(文靖)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