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호(金世鎬)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138D638B1816X0 |
자(字) | 치현(稚賢) |
호(號) | 수재(修齋) |
생년 | 1806(순조 6) |
졸년 | 1884(고종 2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청풍(淸風)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진교(金晉敎) |
저술 | 『논어석의(論語釋疑)』 |
저술 | 『강화설제편(講話說諸篇)』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세호(金世鎬)
1806년(순조 6)∼1884년(고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현(稚賢), 호는 수재(修齋).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진교(金晉敎)의 아들이다.
1843년(헌종 9) 식년문과에 병과로, 184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각각 급제한 뒤 부교리(副校理)로 출사(出仕)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당시 민란이 빈발하던 경상좌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예천‧흥해(興海)‧양산‧장기(長鬐)‧안동‧동래 등지의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였다.
그뒤 사간원 대사헌‧이조참의‧이조참판을 거쳐 1869년(고종 6)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동안 저지대에 위치하여 수해가 잦았던 영일현과 진보현의 읍치(邑治)를 고지대로 옮기고, 포항진(浦項鎭)을 복설하는 대신 청천진(晴川鎭)을 폐치, 해안방비체제를 강화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1874년 민정의 규찰을 태만히 하고 훈도 이동준(李東畯)과 공모하여 변흔(邊釁)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암행어사 박정양(朴定陽)의 탄핵을 받아 견직(譴職)당한 뒤 중화(中和)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 노모의 간절한 정성으로 향리방축(鄕里放逐)된 다음 1879년 방면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저술로는 『논어석의(論語釋疑)』‧『강화설제편(講話說諸篇)』 등이 있다.
1843년(헌종 9) 식년문과에 병과로, 184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각각 급제한 뒤 부교리(副校理)로 출사(出仕)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당시 민란이 빈발하던 경상좌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예천‧흥해(興海)‧양산‧장기(長鬐)‧안동‧동래 등지의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였다.
그뒤 사간원 대사헌‧이조참의‧이조참판을 거쳐 1869년(고종 6)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동안 저지대에 위치하여 수해가 잦았던 영일현과 진보현의 읍치(邑治)를 고지대로 옮기고, 포항진(浦項鎭)을 복설하는 대신 청천진(晴川鎭)을 폐치, 해안방비체제를 강화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1874년 민정의 규찰을 태만히 하고 훈도 이동준(李東畯)과 공모하여 변흔(邊釁)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암행어사 박정양(朴定陽)의 탄핵을 받아 견직(譴職)당한 뒤 중화(中和)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 노모의 간절한 정성으로 향리방축(鄕里放逐)된 다음 1879년 방면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저술로는 『논어석의(論語釋疑)』‧『강화설제편(講話說諸篇)』 등이 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高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박민영(朴敏泳)
대표명 | 김세호(金世鎬) |
성명 | 김세호(金世鎬) |
성명 : "김세호(金世鎬)"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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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