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정면조(鄭冕朝)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815BA74C870B1813X0
자(字)양중(陽仲)
호(號)석천(石川)
생년1803(순조 3)
졸년1862(철종 13)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정기성(鄭基成)

[상세내용]

정면조(鄭冕朝)
1803년(순조 3)~1862년(철종 13)(주1)
졸년
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졸년 추가함.
.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양중(陽仲)이고, 호는 석천(石川)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증조부는 정동은(鄭東殷)이고, 조부는 정일용(鄭一容)이며, 부친은 정기성(鄭基成)이다. 외조부는 전주이씨 이명오(李命吾)이고, 처부는 전주이씨 이익원(李翼遠)과 경주이씨 이영원(李永元)이다. 동생은 정만조(鄭晩朝)이다.

1837년(헌종 3) 식년시에 진사 3등 42위로 합격하였고, 1858년(철종 9) 식년시에서 갑과 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진주목사(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858년(철종 9) 춘당대(春塘臺) 추도기(秋到記)에 참여, 부(賦)부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직부전시(直赴殿試)되었다. 1860년(철종 11)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 온 경평군(慶平君) 이호(李晧)가 귀국 후에 올린 글에 불손하다며, 대사헌(大司憲) 서대순(徐戴淳)‧집의(執義) 신철구(申轍求)‧사간(司諫) 조경순(趙璟淳) 등이 의금부(義禁府)의 나국(拿鞠)을 청할 때 동참하였다. 이호는 결국 전라남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1861년(철종 12)에는 염종수(廉宗秀)가 지위를 이용해서 용담(龍潭)이라는 글자를 파내고 파평(坡平)으로 관향(貫鄕)을 바꾸는 등의 죄를 범한 사실을 아뢰고, 사간원대사간으로서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 등과 함께 염종수를 탄핵하였다. 염종수는 끝내 참수(斬首)되었다.

[참고문헌]

搢紳譜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八道總錄
哲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