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염순(徐念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5FCC21CB1800X0 |
자(字) | 경조(敬祖) |
시호(諡號) | 문숙(文肅) |
생년 | 1800(정조 24)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서공보(徐恭輔) |
생부 | 서춘보(徐春輔)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염순(徐念淳)
1800년(정조 24)~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조(敬祖)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고조는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고, 증조부는 영상(領相) 서지수(徐志修)이며, 조부는 서유후(徐有後)이다. 부친은 서공보(徐恭輔)이고, 생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서춘보(徐春輔)이다. 외조부는 현감(縣監) 이집인(李集麟)과 이응배(李應培)이고, 처부는 구양원(具陽元)이다. 형 서은순(徐恩淳)과 서제(庶弟) 서각순(徐恪淳)‧서흔순(徐忻淳)이 있다.
1819년(순조 19) 식년시에 생원 3등 11위로 합격하였으며, 1827년(순조 27) 증광시에 병과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승지(承旨)‧양주목사(楊州牧使)‧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832년(순조 32) 안주목(安州牧)의 집 3백 81호(戶)가 불에 탄 일이 일어났을 때, 별 겸춘추(別兼春秋)로서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아가 백성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 1834년(순조 34) 옥당(玉堂)에서 사위(嗣位)를 연명한 차자(箚子)로 청하였다가 왕의 분노를 샀다. 1837년(헌종 3) 도둑이 들어 준원전(濬源殿)에 있던 어용(御容)의 초면(綃面)이 손상되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재임용되었다. 1842년(헌종 8) 황해감사(黃海監司) 시절 황해도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심의면(沈宜冕)의 장계로 인해 벌을 받았다가 다시 임용되었다.
1858년(철종 9) 청북암행어사(淸北暗行御史) 이건필(李建弼)의 서계로 탄핵을 받았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910년(융희 4)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고조는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고, 증조부는 영상(領相) 서지수(徐志修)이며, 조부는 서유후(徐有後)이다. 부친은 서공보(徐恭輔)이고, 생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서춘보(徐春輔)이다. 외조부는 현감(縣監) 이집인(李集麟)과 이응배(李應培)이고, 처부는 구양원(具陽元)이다. 형 서은순(徐恩淳)과 서제(庶弟) 서각순(徐恪淳)‧서흔순(徐忻淳)이 있다.
1819년(순조 19) 식년시에 생원 3등 11위로 합격하였으며, 1827년(순조 27) 증광시에 병과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승지(承旨)‧양주목사(楊州牧使)‧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832년(순조 32) 안주목(安州牧)의 집 3백 81호(戶)가 불에 탄 일이 일어났을 때, 별 겸춘추(別兼春秋)로서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아가 백성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 1834년(순조 34) 옥당(玉堂)에서 사위(嗣位)를 연명한 차자(箚子)로 청하였다가 왕의 분노를 샀다. 1837년(헌종 3) 도둑이 들어 준원전(濬源殿)에 있던 어용(御容)의 초면(綃面)이 손상되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재임용되었다. 1842년(헌종 8) 황해감사(黃海監司) 시절 황해도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심의면(沈宜冕)의 장계로 인해 벌을 받았다가 다시 임용되었다.
1858년(철종 9) 청북암행어사(淸北暗行御史) 이건필(李建弼)의 서계로 탄핵을 받았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910년(융희 4)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八道總錄
縉紳八世譜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文科榜目
八道總錄
縉紳八世譜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純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