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길(劉進吉)
[상세내용]
유진길(劉進吉)
1791년(정조 15)∼1839년(헌종 5). 천주교 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서울의 역관(譯官)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에 뜻을 두고 많은 서적들을 통독하던 중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천주교에 흥미를 느껴 교리를 터득한 뒤 입교하였다.
이때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순조 24) 동지사의 수석역관으로 북경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그뒤로는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내왕하면서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신부, 1835년 모방(Maubant)신부, 1836년 샤스탕(Chastan)신부, 그리고 1837년에 앵베르(Imbert)주교를 맞아들인 수 있게 되어, 조선교회는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춘 교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836년에는 모방신부의 주선으로 마카오로 유학가게 된 김대건(金大建)‧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의 세 소년신학생에게 출발하기에 앞서 국어‧한문 등을 학습시키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자 그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서양성직자영입의 책임은 모두 자기에게 있음을 확언하면서 호교론을 펴 박해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모역죄로 몰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정하상과 함께 참수되어 4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1925년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시성(諡聖)되었다.
서울의 역관(譯官)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에 뜻을 두고 많은 서적들을 통독하던 중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천주교에 흥미를 느껴 교리를 터득한 뒤 입교하였다.
이때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순조 24) 동지사의 수석역관으로 북경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그뒤로는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내왕하면서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신부, 1835년 모방(Maubant)신부, 1836년 샤스탕(Chastan)신부, 그리고 1837년에 앵베르(Imbert)주교를 맞아들인 수 있게 되어, 조선교회는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춘 교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836년에는 모방신부의 주선으로 마카오로 유학가게 된 김대건(金大建)‧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의 세 소년신학생에게 출발하기에 앞서 국어‧한문 등을 학습시키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자 그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서양성직자영입의 책임은 모두 자기에게 있음을 확언하면서 호교론을 펴 박해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모역죄로 몰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정하상과 함께 참수되어 4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1925년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시성(諡聖)되었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韓國天主敎會史(Dallet, C. C. 著, 崔奭祐‧安應烈譯註, 분도出版社, 1980)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鞠案
韓國天主敎會史(Dallet, C. C. 著, 崔奭祐‧安應烈譯註, 분도出版社, 1980)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鞠案
[집필자]
이원순(李元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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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