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박영원(朴永元)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15C601C6D0B1791X0
자(字)성기(聖氣)
호(號)오서(梧墅)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791(정조 15)
졸년1854(철종 5)
시대조선후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종순(朴鍾淳)

[상세내용]

박영원(朴永元)
1791년(정조 15)∼1854년(철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기(聖氣), 호는 오서(梧墅). 예조참의 박종순(朴鍾淳)의 아들이다.

1813년(순조 13) 사마시를 거쳐, 18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假注書)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승문원에 보임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824년에는 이가우(李嘉愚)이헌위(李憲瑋)김정희(金正喜) 등과 함께 삭직을 당하였다가, 1837년(헌종 3) 김홍근(金弘根)과 함께 실록교수당상(實錄校讎堂上)의 직을 맡았다. 이어 1844년에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이듬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846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부사(副使) 조형복(趙亨復), 서장관(書狀官) 심희순(沈熙淳)과 함께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11월에는 김흥근(金興根)과 함께 국조보감찬집청교정당상(國朝寶鑑纂輯廳校正堂上)을 제수받았다.

1848년 양선(洋船)의 출몰로 동해안지방의 민심이 소란해지자 함경도관찰사로 특임되었다.

그뒤 철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라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4월에 소를 올려 그 직을 사임하였다.

1854년(철종 5) 12월에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經山集
國朝榜目

[집필자]

유원동(劉元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