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원(李是遠)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2DCC6D0B1789X0 |
자(字) | 자직(子直) |
호(號) | 사기(沙磯) |
시호(諡號) | 충정(忠貞) |
생년 | 1790(정조 14) |
졸년 | 1866(고종 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면백(李勉伯) |
저서 | 『야사초(野史鈔)』 |
[상세내용]
이시원(李是遠)
1790년(정조 14)∼1866년(고종 3). 조선 후기의 문신‧의사(義士).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
정종의 별자(別子)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진사 이면백(李勉伯)의 아들이며, 이건창(李建昌)의 할아버지이다.
1815년(순조 15)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1824년 태천현감이 되어 치적을 쌓았다.
1826년 홍문관교리를 제수받았고, 이듬해에는 지제교에 뽑혔으며, 다시 성균관사성‧사헌부장령을 거쳐 통례원상례를 제수받았다.
1833년에 경기어사가 되어서는 험한 지역에까지 방방곡곡 두루 다니며 각처의 풍속과 백성의 곤궁을 몸소 살폈다.
헌종 초년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춘천부사 자리가 비어, 조정에서 모두 그를 추천하였으나 극력 사양하다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이 있어 할수없이 부임하였다. 마침 큰 흉년이 들었는데, 관전(官錢)을 내어 쌀을 팔아 백성들을 급히 구제하였다.
그뒤 10여년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849년(헌종 15)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제수받았는데, 이때 개성인삼을 가지고 홍삼을 만들어 팔던 당시 역인(驛人)들의 포소(包所: 개성인삼을 쪄서 홍삼을 만들던 곳) 세(稅)포탈을 엄히 다스렸다.
1852년(철종 3) 승정원좌승지‧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제수받고, 185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전병사 이근영(李根永)의 탐학을 탄핵하였다.
1864년(고종 1) 지종정경부사(知宗正卿府事)가 되고 다시 대사헌‧좌참찬‧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조판서‧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동지성균관사를 지냈다.
1866년에는 특지(特旨)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해 가을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시문 10권과 고금서초(古今書鈔) 100여권, 『야사초(野史鈔)』 몇 권이 후손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편서(編書)로는 『정주도회과작(定州都會科作)』 1책이 있다.
정종의 별자(別子)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진사 이면백(李勉伯)의 아들이며, 이건창(李建昌)의 할아버지이다.
1815년(순조 15)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1824년 태천현감이 되어 치적을 쌓았다.
1826년 홍문관교리를 제수받았고, 이듬해에는 지제교에 뽑혔으며, 다시 성균관사성‧사헌부장령을 거쳐 통례원상례를 제수받았다.
1833년에 경기어사가 되어서는 험한 지역에까지 방방곡곡 두루 다니며 각처의 풍속과 백성의 곤궁을 몸소 살폈다.
헌종 초년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춘천부사 자리가 비어, 조정에서 모두 그를 추천하였으나 극력 사양하다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이 있어 할수없이 부임하였다. 마침 큰 흉년이 들었는데, 관전(官錢)을 내어 쌀을 팔아 백성들을 급히 구제하였다.
그뒤 10여년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849년(헌종 15)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제수받았는데, 이때 개성인삼을 가지고 홍삼을 만들어 팔던 당시 역인(驛人)들의 포소(包所: 개성인삼을 쪄서 홍삼을 만들던 곳) 세(稅)포탈을 엄히 다스렸다.
1852년(철종 3) 승정원좌승지‧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제수받고, 185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전병사 이근영(李根永)의 탐학을 탄핵하였다.
1864년(고종 1) 지종정경부사(知宗正卿府事)가 되고 다시 대사헌‧좌참찬‧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조판서‧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동지성균관사를 지냈다.
1866년에는 특지(特旨)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해 가을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시문 10권과 고금서초(古今書鈔) 100여권, 『야사초(野史鈔)』 몇 권이 후손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편서(編書)로는 『정주도회과작(定州都會科作)』 1책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哲宗實錄
騎驢隨筆
大韓季年史(鄭喬, 國史編纂委員會, 1957)
哲宗實錄
騎驢隨筆
大韓季年史(鄭喬, 國史編纂委員會, 1957)
[집필자]
이동희(李東熙)
명 : "시원(是遠)"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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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