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승(鄭文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BB38C2B9B1788X0 |
자(字) | 윤지(允之) |
호(號) | 초천(蕉泉) |
시호(諡號) | 효헌(孝憲) |
생년 | 1788(정조 12) |
졸년 | 1875(고종 1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술인(鄭述仁) |
[상세내용]
정문승(鄭文升)
1788년(정조 12)∼1875년(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윤지(允之), 호는 미당(美堂)‧초천(蕉泉).
판관 정술인(鄭述仁)의 아들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마가 된 뒤, 담양부사 등 여러 주군(州郡)의 지방관을 거쳐 공조판서‧지의금부사‧지중추부사‧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0년(고종 7)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1875년 숭정계(崇政階)에 올라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이해에 죽었다. 관직에 있는 동안 한결같이 근면하였고, 백성을 자식과 같이 생각하며 구휼하는 데 힘썼다.
당시 사류들이 그의 청렴함을 추앙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후학의 모범이 되었으며, 특히 산수화에 능하였다. 더욱이 고인장(古印章)에 대한 조예도 깊어 즐겨 수집하였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판관 정술인(鄭述仁)의 아들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마가 된 뒤, 담양부사 등 여러 주군(州郡)의 지방관을 거쳐 공조판서‧지의금부사‧지중추부사‧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0년(고종 7)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1875년 숭정계(崇政階)에 올라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이해에 죽었다. 관직에 있는 동안 한결같이 근면하였고, 백성을 자식과 같이 생각하며 구휼하는 데 힘썼다.
당시 사류들이 그의 청렴함을 추앙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후학의 모범이 되었으며, 특히 산수화에 능하였다. 더욱이 고인장(古印章)에 대한 조예도 깊어 즐겨 수집하였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嘉梧藁略
槿域書畵徵
哲宗實錄
高宗實錄
嘉梧藁略
槿域書畵徵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대표명 | 정문승(鄭文升) |
성명 | 정문승(鄭文升)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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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