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金命喜)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BA85D76CB1788X0 |
자(字) | 성원(性源) |
호(號) | 산천(山泉) |
생년 | 1788(정조 1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예술‧체육 > 서예가 |
부 | 김노경(金魯敬) |
[상세내용]
김명희(金命喜)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서예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山泉).
김노경(金魯敬)의 아들이며, 김정희(金正喜)의 아우이다. 학문이 깊고 시문과 글씨에 능하였다.
1810년 진사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관직은 강동현령(江東縣令)에 그쳤다.
1822년 동지 겸 사은정사인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경(燕京)에 들어가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및 진남숙(陳南淑)‧오숭량(吳嵩梁)‧이장욱(李璋煜) 등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유희해에게 우리나라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법을 따랐지만 형 김정희의 글씨를 익혔으며, 특히 그의 소해(小楷)는 형의 글씨와 흡사하다. 그리고 감식에도 상당히 뛰어났으나 형의 명성이 워낙 높아 오히려 빛을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 있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이며, 김정희(金正喜)의 아우이다. 학문이 깊고 시문과 글씨에 능하였다.
1810년 진사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관직은 강동현령(江東縣令)에 그쳤다.
1822년 동지 겸 사은정사인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경(燕京)에 들어가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및 진남숙(陳南淑)‧오숭량(吳嵩梁)‧이장욱(李璋煜) 등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유희해에게 우리나라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법을 따랐지만 형 김정희의 글씨를 익혔으며, 특히 그의 소해(小楷)는 형의 글씨와 흡사하다. 그리고 감식에도 상당히 뛰어났으나 형의 명성이 워낙 높아 오히려 빛을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 있다.
[참고문헌]
海東金石苑
韓國書畵人名辭典(金榮胤, 藝術春秋社, 1959)
韓國의 美 17―秋史金正喜―(任昌淳監修, 中央日報 季刊美術, 1985)
韓國書畵人名辭典(金榮胤, 藝術春秋社, 1959)
韓國의 美 17―秋史金正喜―(任昌淳監修, 中央日報 季刊美術, 1985)
[집필자]
박은순(朴銀順)
대표명 | 김명희(金命喜) |
성명 | 김명희(金命喜) |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