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석(洪羲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D76CC11DB1787X0 |
자(字) | 낙서(洛瑞) |
생년 | 1787(정조 1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풍산(豊山) |
활동분야 | 문신 |

부 | 홍순호(洪純浩)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홍희석(洪羲錫)
1787년(정조 11)~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구서(龜瑞)‧낙서(洛瑞)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증조부는 홍중오(洪重五)이고, 조부는 주서(注書) 홍정보(洪靖輔)이며, 부친은 홍순호(洪純浩)이다. 처부는 군수(郡守) 신경유(辛景愈)이다.
1816년(순조 16) 식년시에 생원 3등 7위로 합격하였고, 1829년(순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 8위로 합격하였다.
1826년(순조 26)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재직 중, 충청우도암행어사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민정을 잘 살피지 못한다고 보고되었다. 1832년(순조 32)에 암행어사에 적합한 사람으로 추천되었고, 1833년(순조 33) 황해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윤석영(尹錫永)은 그가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올라 암행어사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들이 많았을 뿐만아니라 뇌물을 받았다며 그를 비판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홍문관(弘文館)관원으로 선발되었고, 1837년(헌종 3) 선왕의 삼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태묘(太廟)로 모실 때에 참여하여 품계가 올라가게 되었다. 또한 1846년(헌종 12)에도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품계가 상승하였다. 1847년(헌종 13)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임명되어 고군산(古群山)에 이양선(異樣船)이 왔었던 사실을 보고하였다. 슬하에 아들 홍형모(洪衡謨)‧홍휘모(洪徽謨)‧홍철모(洪徹謨)와, 서자 홍연모(洪衍謨)를 두었다.
1816년(순조 16) 식년시에 생원 3등 7위로 합격하였고, 1829년(순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 8위로 합격하였다.
1826년(순조 26)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재직 중, 충청우도암행어사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민정을 잘 살피지 못한다고 보고되었다. 1832년(순조 32)에 암행어사에 적합한 사람으로 추천되었고, 1833년(순조 33) 황해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윤석영(尹錫永)은 그가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올라 암행어사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들이 많았을 뿐만아니라 뇌물을 받았다며 그를 비판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홍문관(弘文館)관원으로 선발되었고, 1837년(헌종 3) 선왕의 삼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태묘(太廟)로 모실 때에 참여하여 품계가 올라가게 되었다. 또한 1846년(헌종 12)에도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품계가 상승하였다. 1847년(헌종 13)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임명되어 고군산(古群山)에 이양선(異樣船)이 왔었던 사실을 보고하였다. 슬하에 아들 홍형모(洪衡謨)‧홍휘모(洪徽謨)‧홍철모(洪徹謨)와, 서자 홍연모(洪衍謨)를 두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憲宗實錄
憲宗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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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