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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선(鄭基善){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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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백(元伯)
호(號)수석(脩石)
생년1784(정조 8)
졸년1839(헌종 5)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지용(鄭持容)
외조부이창중(李昌中)
출신지한양

[상세내용]

정기선(鄭基善)
1784년(정조 8)∼1839년(헌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백(元伯), 호는 수석(脩石)(주1)
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함.
. 한양 출신.

부친은 정지용(鄭持容)이며, 모친은 이창중(李昌中)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15년 다시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된 뒤 함경도암행어사로 발탁되어 문란한 지방행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활약하였다.

예를 들면 영흥부부사였던 엄기(嚴耆) 등의 잘못을 적발하여 논죄하는 한편, 각 고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과 장부를 조사하여 허류(虛留) 등 부정행위를 단속하고, 아울러 제진(諸鎭)의 봉수대와 목장 및 일로(馹路)의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1817년 홍문록에서 4점을 얻은 뒤 직각검상이조참의 등을 지내고 부제학을 거쳐, 1829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왜관소통사(倭館小通事) 배말돈(裵末敦)이 왜인들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을 계기로 하여 동래부사부산첨사를 문책하는 한편, 왜인들을 방어하는 대책을 수립함과 아울러 국가에서도 강경책을 쓰도록 건의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그는 경상도관찰사로서 도내에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왕은 특별히 내탕금(內帑金)1만냥을 하사하였으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뒤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거쳐 1833년에는 드디어 예조판서에 올랐고 그 이듬해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대표명정기선(鄭基善){1}
성명정기선(鄭基善)
원백(元伯)

자 : "원백(元伯)"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5-25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