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하(金重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911D558B1784X0 |
자(字) | 치상(稚常) |
호(號) | 동소(桐巢) |
생년 | 1784(정조 8) |
졸년 | 1860(철종 1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풍산(豊山)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김종봉(金宗鳳) |
출신지 | 경상북도 영천 |
[상세내용]
김중하(金重夏)
1784년(정조 8)∼1860년(철종 1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치상(稚常), 호는 동소(桐巢). 경상북도 영천 출신. 김종봉(金宗鳳)의 아들이다.
20세 때 이미 정문(程文: 과거를 볼 때 쓰던 일정한 법식의 문장) 각체(各體)를 모두 떼었으나, 1835년(헌종 1)에 비로소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 1837년 사헌부지평, 1852년(철종 3) 홍문관교리, 1853년 통정부호군 겸 오위장과 돈녕부도정, 1855년 형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원하지 않아 모두 사양하고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헌종이 죽었을 때 곡반(哭班: 국상 때에 곡하는 벼슬아치의 반열)에 참여하기 위하여 한번 조정에 나갔을 뿐이다.
세상사람들로부터 남주(南州)에서 인격이 가장 고결한 선비로 꼽혔다고 한다.
20세 때 이미 정문(程文: 과거를 볼 때 쓰던 일정한 법식의 문장) 각체(各體)를 모두 떼었으나, 1835년(헌종 1)에 비로소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 1837년 사헌부지평, 1852년(철종 3) 홍문관교리, 1853년 통정부호군 겸 오위장과 돈녕부도정, 1855년 형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원하지 않아 모두 사양하고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헌종이 죽었을 때 곡반(哭班: 국상 때에 곡하는 벼슬아치의 반열)에 참여하기 위하여 한번 조정에 나갔을 뿐이다.
세상사람들로부터 남주(南州)에서 인격이 가장 고결한 선비로 꼽혔다고 한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강진갑(康鎭甲)
명 : "중하(重夏)"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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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