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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모(洪彦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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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원(聖源)
생년1783(정조 7)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홍희수(洪羲綏)

[상세내용]

홍언모(洪彦謨)
1783년(정조 7)~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성원(聖元)‧성원(聖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증조부는 홍경보(洪鏡輔)이고, 조부는 홍문호(洪文浩)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 홍희수(洪羲綏)이다. 외조부는 홍임(洪)이고, 처부는 영의정(領議政) 김재찬(金載瓚)이다. 형제는 홍선모(洪善謨)‧홍헌모(洪憲謨)‧홍원모(洪遠謨) 등이다.

1804년(순조 4) 식년시에 진사 2등 10위로 합격하였고, 1814년(순조 14) 정시에 병과 4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지평(持平)‧부교리(副敎理)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821년(순조 21)에는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고부사(告訃使) 홍명주(洪命周)와 함께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또한, 사행도중에 산해관(山海關) 남쪽 연해안 수 천리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괴질(怪疾)로 사망한 사건을 접하고, 사망사건의 원인이 종교적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 신도들의 독약 살포라는 별단(別單)을 올려 보냈다. 1826년(순조 26) 의금부사(義禁府使) 여동식(呂東植)의 상소를 문제 삼아 유배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27년(순조 27)에 비변사에서 택한 어사(御使) 후보 10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또한, 같은 해에 ‘임금은 후일을 대비하여 정사(政事)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상소한 지평 목태석(睦台錫)의 상소문 중 과한 표현을 문제 삼아 전라남도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를 보내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참고문헌]

文蔭譜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純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