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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모(洪錫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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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홍석영(洪錫榮)
자(字)경부(敬敷)
호(號)근와(近窩)
호(號)도애(陶厓)
호(號)사옹(蒒翁)
호(號)망서당(望西堂)
호(號)옥탄거사(玉灘居士)
호(號)일양헌(一兩軒)
호(號)자각산인(紫閣山人)
호(號)찬승자(餐勝子)
생년1781(정조 4)
졸년1857(철종 9)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희준(洪羲俊)
용인이씨(龍仁李氏)
조부홍양호(洪良浩)
처부한용탁(韓用鐸)
외조부이장호(李章祜)

[상세내용]

홍석모(洪錫謨)
1781년(정조 5)∼1857년(철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부(敬敷), 호는 구화재(九華齋)근와(近窩)도애(陶厓)망서당(望西堂)사옹(蒒翁)옥탄거사(玉灘居士)일양헌(一兩軒)자각산인(紫閣山人)찬승자(餐勝子).

조부는 조선후기의 저명한 학자인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이며, 부친은 이조판서 훈곡(薰谷) 홍희준(洪羲俊)이다. 그의 사촌형인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 또한 이조판서를 지냈다. 모친은 용인이씨(龍仁李氏)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이장호(李章祜)의 딸이다. 부인은 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한용탁(韓用鐸)의 딸로, 홍건주(洪健周)홍선주(洪善周)를 아들로 두었다. 어렸을 때의 교육은 조부인 홍양호에게서 이루어졌다. 도애(陶厓) 홍석모(洪錫謨)의 집안은 풍산홍씨조선후기의 벌열세가에 속한다.

그는 조부로부터 서예와 경전을 직접 배웠다. 그와 교유한 인물로는 송지양(宋持養), 송만재(宋晩載), 최황(崔璜), 남진화(南進和), 이탁원(李鐸遠), 정원용(鄭元容), 이교영(李敎英), 홍현주(洪顯周), 이명오(李明五), 조운현(趙雲鉉), 남진화(南進和), 윤명규(尹明奎), 조봉진(曺鳳振), 박영원(朴永元) 등이 있으며 서유구(徐有榘)를 종유(從遊)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종형인 관암과 함께 조부 홍이계를 모시면서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18세 무렵 혼인을 계기로 홍이계로부터 멀어졌다. 도애는 1804년(순조 4) 24세에 종산(鐘山)에서 과거공부를 할 때 상심계(賞心契)라는 시사(詩社)를 주도하였다. 이때의 기록이 『상심록(賞心錄)』이다. 그는 그해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2등으로 합격하였다. 1815년(순조 15) 35세에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학장의(大學掌議)가 되었다. 1818년(순조 18) 38세에 추조(秋曹)에서 근무하였고, 1819년 39세에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부임하였으며, 1820년 40세에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826년(순조 26) 겨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떠나는 아버지 홍희준을 배행하고 연행을 하였다. 1832년(순조 32) 52세에 세자익찬(世子翊贊)이 되었다. 1833년(순조 33) 4월 17일 태창령(太倉令)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 9일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임명되었다. 59세 되던 1839년(헌종 5) 4월 3일 강릉령(康陵令)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국사(菊社)라는 시사를 주도하였다. 1857년(철종 9) 10월 15일 부인이 죽고 나흘 뒤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홍석모의 학문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조부인 이계의 영향에 받아 그도 도교와 불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의 집안에는 대대로 수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도교와 불교에 대한 책도 대단히 많았다. 그는 이처럼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도교와 불교의 서적에 대하여 폭넓은 독서경험을 하였으며, 그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투영되었다.

홍석모『도애시집(陶厓詩集)』, 『도애시문선(陶厓詩文選)』, 『상심록(賞心錄)』, 『유연고(遊燕藁)』 등의 저작을 통하여 약간의 산문과 6,000수가 넘는 대량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세계를 분류한다면, 잡체시(雜體詩), 정물시, 수창시(酬唱詩), 기행시, 하층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시, 민속과 연희에 대한 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조선 팔도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하였다. 그가 다닌 곳을 대충 들어보면, 2차에 걸친 평양, 4차에 걸친 강화도, 2차에 걸친 개성, 남한강, 황해도, 함경도, 금강산, 황간, 김천, 금강, 가야산 해인사, 관동관서, 연경사행, 남원 등이며 늙어서도 쉬지 않고 근거리 여행을 다녔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이 경험한 국토자연을 시로 형상화하였는데, 명승고적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시로 남겼다.

한편 그는 11세부터 우리 전통의 민속과 연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전생애에 걸쳐 꾸준하게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란 산문 저술로 남겨졌으며, 7언 절구 126수의 『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로 집대성 되었다. 그는 국내의 민속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연행당시 중국의 민속과 풍속에도 관심을 가져 이를 『유연고(遊燕藁)』로 남겼다.

[참고문헌]

冠巖全書
陶厓詩文選
陶厓詩集
望西堂帖
賞心錄
遊燕藁
耳溪集
傳舊
黃澗郡邑誌

[집필자]

이관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