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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풍렬(尹豊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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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유(大有)
생년1780(정조 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윤석동(尹晳東)

[상세내용]

윤풍렬(尹豊烈)
1780년(정조 4)~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대유(大有)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윤항(尹沆)이고, 조부는 윤득양(尹得養)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윤석동(尹晳東)이다. 외조부는 정동윤(鄭東尹)이고, 처부는 정술인(鄭述仁)이다.

1810년(순조 10) 식년시에서 생원 3등 1위로 합격하였고, 1811년(순조 11) 정시 문과에서 병과 2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부교리(副校理)‧도청(都廳)‧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아경(亞卿) 등을 역임하였다.

1813년(순조 13) 각권(閣圈)을 시행하였는데, 대교(待敎)에 5점의 권점을 받았다. 다음 해에 한림권점(翰林圈點)에 대한 성명(成命)을 내려졌으나 별겸춘추()들이 모두 인책하고 부양하지 않자, 도당(都堂)에 특명하여 권점을 행할 때에 6점을 받았다. 이후 1817년(순조 17) 홍문록(弘文錄)에서 4점을 받았고, 도당회권(都堂會圈)에서 5점을 받았다. 1818년(순조 18) 이익운()을 비변사의 당상으로 차출한 일로 대신을 논척하는 통문(通文)을 돌린 양규(梁珪)의 아들 양종륜(梁鍾倫)을 공초할 때 언급된 사람들을 문초할 것을 부교리 남주헌(南周獻) 등과 함께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렸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한, 사간(司諫) 정도채(鄭度采)를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부교리 김재원(金在元)과 함께 연명차자를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인 건릉(健陵)을 옮길 때 천릉도감(遷陵都監)에서 도청(都廳)의 소임을 수행하여 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었다. 1822년(순조 22)에는 성균관대사성으로 재직하던 중에 홍역을 치른 나이 어린 유생들이 많아 승보시(陞補試)를 내년 봄으로 미뤄줄 것을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榜目
純祖實錄

[집필자]

이후남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