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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룡(宋成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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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서(元瑞)
생년1780(정조 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송경한(宋景漢)

[상세내용]

송성룡(宋成龍)
1780년(정조 4)~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원서(元瑞)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증조부는 영조 대에 청주(淸州)의 유학(幼學)으로서 송시열(宋時烈)의 원사(院祀를) 복향(復享)할 것 등을 상소로 올려 이후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무고한 것이라는 주장을 낳은 송재후(宋載厚)이고, 조부는 송항진(宋恒鎭)이며, 부친은 송경한(宋景漢)이다. 모친은 김필태(金必泰)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33세로 정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활동하면서, 1830년(순조 30) 왕세자가 각혈을 하고 곧 승하하자 왕세자의 치료에 관여한 자들의 처벌을 건의하였다. 특히 약제를 지어올린 의관(醫官) 이명운(李命運)‧내국제조(內局提調) 홍기섭(洪起燮) 등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약원제거(藥院提擧)도 아니고 의약(醫藥)에 익숙하지도 않으면서 약제를 첨가한 김로(金鏴)를 탄핵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간언이 너무하다고 생각한 순조는 송성룡(宋成龍)을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에 등용되지 못하도록 하고 시골로 내쫓아버렸다. 1832년(순조 32)에 방축향리(放逐鄕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