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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관(任百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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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화(致和)
생년1778(정조 2)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천(豊川)
활동분야무신
임후상(任厚常)

[상세내용]

임백관(任百觀)
1778년(정조 2)~미상.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치화(致和)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임열(任說)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승지(承旨) 임순(任珣)이고, 조부는 임희인(任希仁)이며, 부친은 승지 임후상(任厚常)이다. 외조부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문덕(李文德)이고, 처부는 심능계(沈能繼)이다.

1803년(순조 3) 증광시에서 무과 급제하였고, 1818년(순조 18) 중시에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남선전관(南宣傳官)‧개천군수(价川郡守)‧갑산부사(甲山府使)‧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개천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겁을 먹고는 전란수습에 소극적이었다며 파면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갔었다. 그러나 평안감사(平安監司)에 의해 영변부사(寧邊府使) 오연상(吳淵常)‧태천현감(泰川縣監) 유정양(柳鼎養)‧운산군수(雲山郡守) 한상묵(韓象黙)과 함께 고을의 군사를 모집하고 약산산성(藥山山城)을 수비한 일이 알려졌다. 하지만 홍경래의 난 당시 상사(上司)에게 개인 사정을 이유로 개천군수직을 계속 맡을 수 없다고 청했던 사실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1812년(순조 12)에 올린 장계(狀啓)를 통해 조정에 알려지면서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부호군(副護軍) 오연상(吳淵常)이 당시 난을 당해 머뭇거린 것은 본성(本城)에 나와 부임하라는 관찰사의 명이 없었던 것에 기인함으로 벌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임백관(任百觀)을 비호하면서 처벌을 피하였다.

[참고문헌]

武譜
純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