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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李止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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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진(景進)
호(號)희곡(希谷)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777(정조 1)
졸년1841(헌종 7)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의열(李義悅)
외조부홍억(洪憶)
저서『희곡유고』

[상세내용]

이지연(李止淵)
1777년(정조 1)∼1841년(헌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곡(希谷). 세종의 다섯째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공조참의 이의열(李義悅)의 아들이며, 모친은 판중추부사 홍억(洪憶)의 딸이다.

1805년(순조 5)에 진사가 되고,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06년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다.

1808년 병조좌랑에 이어 지평, 이듬해 예조참판을 거쳐 1823년 공시당상(貢市堂上)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지방수령으로 민폐를 없애기 위해 전부(田賦)를 전(錢)으로 대신할 것, 호적의 법규를 개정할 것, 공염(公鹽)을 몰래 거래함을 단속할 것 등을 청하였다.

1827년 한성판윤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예조판서광주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834년 호조판서가 되어 공인(貢人)방납의 폐단을 바로잡았다.

1837년(헌종 3)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는 실록청총재관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같은해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좌의정 박종훈(朴宗薰)이 사직함으로써 홀로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적(糶糴)을 고르게 하고, 연화(燕貨)를 금하며, 전정(田政)을 바로잡을 것 등을 건의하였다.

조대비(趙大妃)의 측근자로서 1839년 사교를 금할 것을 주장하여 앙베르(Imbert, L. M. J.)모방(Maubant, P.)샤스탕(Chastan, J.)프랑스 신부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을 학살한 기해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1840년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의준(李義準) 등에 의하여 정권을 마음대로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었으며, 뜻이 깊고 생각이 원대하였다.

저서로 『희곡유고』와 편서로 『장의공자손보(章懿公子孫譜)』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經山集
天主敎迫害(崔奭祐, 한국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81)

[집필자]

김동철(金東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