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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군칙(禹君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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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776(영조 52)
졸년1812(순조 12)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기타 > 풍수가
출신지평안도 태천현

[상세내용]

우군칙(禹君則)
1776년(영조 52)∼1812년(순조 12). 조선 후기의 풍수복설가(風水卜說家)이며, 홍경래(洪景來)난의 모사(謀士). 평안도 태천현 출신. 가산군 동북면에 살면서 풍수‧복설을 생업으로 삼았다.

당시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인 신분제도의 질곡(桎梏),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의 횡포 및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피폐한 민생을 구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가, 가산 청룡사(靑龍寺)에서 홍경래를 만나 1811년(순조 11) 반란모의의 주동자가 되었다.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에 의하면 “홍경래가 모사가 되고 우풍수(禹風水)가 괴수가 되어”라든지 “우군칙은 지혜가 제갈량(諸葛亮)을 앞서고 용강홍경래는 재주가 조자룡(趙子龍)보다 낫다.”고 하여 그의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

풍수와 복설을 이용하여 가산의 역속(驛屬) 출신으로 거부를 축적한 이희저(李禧著)를 꾀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가산 다복동에 봉기의 준비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인삼밀매 금지령에 불만을 품은 개성평양의주 등지의 거상부호들도 봉기에 참여시켰다.

한편, 당시 잠채광업(潛採鑛業)이 성행하여 각처의 빈민들이 광산촌에 운집해 있음에 착안하여, 운산 초래봉 밑에 광산을 열고 노동자를 모아 봉기 때 병사로 동원하였다.

정주성이 함락되자 가족을 데리고 이희저와 함께 도주하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 참수되고 머리는 효수된 뒤 팔도에 돌려 보여졌다.

공초에 의하면, “얼굴은 철색(鐵色)이며 뺨은 좁고 길며 강파르고, 수염이 갓 났으며 누르고, 하관은 빠르며, 눈은 핏발이 서 있고, 5척의 단구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日省錄
純祖實錄
關西平亂錄
洪景來와 辛未變亂(玄相允, 半島史話와 樂土滿洲, 1943;韓國學硏究叢書 1, 成進文化社, 1971)
洪景來亂과 定州城圖(李丙燾, 白山學報 3, 白山學會, 1967)
洪景來叛亂の槪略と其の動機に就いて(小田省吾, 靑丘學叢 8‧11, 1932‧1933)

[집필자]

정석종(鄭奭鍾)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