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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수(朴綺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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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미호(眉皓)
호(號)이탄재(履坦齋)
시호(諡號)효문(孝文)
생년1774(영조 50)
졸년1845(헌종 11)
시대조선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종신(朴宗臣)

[상세내용]

박기수(朴綺壽)
1774년(영조 50)∼1845년(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호(眉皓), 호는 이탄재(履坦齋). 우부승지 박종신(朴宗臣)의 아들이다.

문예가 조숙하여 나이 15, 16세에 이미 문명이 있었다.

1795년(정조 19) 진사가 되고, 1806년(순조 6)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지중추부사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816년 서장관이 되었고,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824년 전라감사가 되어 부호들의 옥사(獄事)와 간범자(干犯者)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또, 선비들을 시험하여 효행이 있고 마음이 결백한 자들을 천거하였다.

1825년 하의도(荷衣島)에 표류한 한인(漢人)을 문책할 때 배에 실렸던 철물 2,000여근이 장부에서 누락된 일이 생겨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직제학으로 들어간 뒤 사간원대사간이조판서사헌부대사헌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2년 광주부유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경기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42년(헌종 8) 규장각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지경연(知經筵)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