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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학(愼宜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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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민(敬敏)
생년1772(영조 48)
졸년1829(순조 29)
시대조선후기
본관거창(居昌)
활동분야문신
신사직(愼師稷)

[상세내용]

신의학(愼宜學)
1772년(영조 48)~1829년(순조 2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민(敬敏)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수원(水原)이다.

증조부는 신유후(愼由厚)이고, 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신이복(愼爾復)이며, 부친은 정언(正言)을 지낸 신사직(愼師稷)이다. 외조부는 최부(崔溥)이고, 처부는 이상복(李尙福)이다.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798년(정조 22) 식년시 병과 11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정조 사후 벽파(辟派) 계열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른바 신의학(愼宜學) 옥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1809년(순조 9) 선원전(璿源殿)의 작헌례(酌獻禮)에 통례(通禮)로 참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 받았다. 1810년(순조 10)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로 있을 당시 총부(摠府)의 변통초기(變通草記)을 접수했다는 이유로 서천군(舒川郡)으로 유배되었다. 1822년(순조 22)에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유빈박씨(綏嬪朴氏)의 무덤인 휘경원(徽慶園)의 수봉관(守奉官) 칭호를 참봉으로 개정한 것을 반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승지들과 추고를 받았고, 1823년(순조 23) 함경도 종성부(鍾城府)에 정배되었다. 1829년(순조 29) 부호군(副護軍)으로서 오회연교(五晦筵敎)을 잘 음미하고 천양해야 된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금위영(禁衛營)에서 친국(親鞫)을 받았다. 이 사건을 이른바 신의학의 옥사라고 한다. 이 상소에 대해 옥당(玉堂)과 삼사(三司)의 상소, 그리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남공철(南公轍)과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의 연차(聯箚)가 연이어 올라와 신의학의 상소는 1800년(정조 24)에 이서구(李書九)의 상소가 발단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의 관직과 작위를 추탈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29년(순조 29)에 신의학은 사형에 처해졌고, 심지어 삼사와 대사간 이가우(李嘉愚) 등이 그의 자식도 유배 보내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1839년(헌종 5)에는 그의 조카 신필흠(愼弼欽)이 법을 어기고 과거에 입격(入格)했다고 하여 합격을 취소하고 형배(刑配)시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평(持平) 구치순(具致淳)‧정언 신대원(申大元) 등이 신의학의 배후와 관련 인물을 조사해야 한다고 상소하여 사건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유정양(柳鼎養)‧김로(金鏴)‧홍기섭(洪起燮)‧이인부(李寅溥) 등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가 8개월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864년(고종 1) 고종의 명으로 그의 죄명이 말소되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文蔭譜
純祖實錄
憲宗實錄 高宗實錄

[집필자]

이동인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